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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도가니’만큼 관심 필요한 세계장애여성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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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0-19 09:48 조회35,6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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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권에 관한 개설서의 원고를 탈고했다. 본문에 포함시킬 실제 인권침해 사례들을 찾던 중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되도록 근래에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사례를 찾았는데도 그 수가 너무 많아 고민에 빠졌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조익이라는 사람이 “나라의 불행은 시인의 행운인가”라고 탄식한 적이 있다는데, 이건 완전히 “인권의 침해는 학자의 행운인가”라고 장탄식을 해야 할 지경이다. 그런데 원고를 보낸 직후 <도가니> 열풍으로 장애인에 대한 끔찍한 인권유린이 재조명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언제쯤이면 인권침해 사건이 너무 적어 실제 사례를 고르기가 어려운 날이 올 것인가.

 

현실이 이러한데도 인권이 정치나 사회문제의 중심적 의제로 떠오르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어쩌다 <도가니>와 같은 절호의 계기가 생겨 인권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이해되는 인권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 피해자의 수동성과 고통만 강조되는 시각, 피해자에게 정의를 찾아주기 위해 외부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해 준다는 관점, 부서진 물건을 수리하는 것과 같은 ‘회복적’ 모델에 근거한 접근방식 등이 그것이다. 물론 현 단계에서 이러한 해결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해결조차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하지만 인권이 등장했던 애초의 취지에 부합하려면 인권을 침해 사후의 수동적인 회복 모델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인권의 가장 깊은 의미는 린다 제릴리가 말한 대로 인간이 능동적이고 자신있게 “나도 인간이다!”라고 소리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인권은 회복적 모델을 넘어 인간의 자력화 모델로 나아가는 노력 위에서만 완전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아무리 힘없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나 인간!”이라고 외치는 순간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인간을 주체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권의 궁극적인 목표다.

 

인권의 자력화 모델을 잘 보여주는 아주 드문 모임이 10월17일부터 서울에서 열린다. 제2회 세계장애여성대회가 그것이다. ‘내일을 여는 멋진 여성’이라는 장애여성권리 단체가 주최하는 행사다. 정부의 유관 부처들이 이름을 올리고 각종 기관들이 지원하지만 시민사회단체가 주축이 되어 이 정도 규모의 국제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주최 쪽으로부터 참석자 명단을 받아 보았다. 전세계 모든 대륙에서 60명이 넘는 참석자들이 내한할 예정이다. 통상 이런 대회의 경우 소위 선진국들의 참여가 많기 마련인데 올해 대회의 목표가 새천년 개발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저개발국 장애여성의 자립역량을 키우자는 것이다 보니 특히 개도국 출신의 참석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국내 독지가들이 참석자 한 사람씩과 결연하여 이들의 경비를 책임지고 홈스테이 등을 통해 민간의 도움을 최대한 활용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돈이 모자라고 일손도 모자라 단체의 전 스태프가 사무실에 침낭을 가져다 놓고 숙식을 하면서 대회 준비에 골몰하고 있다. 전문대행업체를 쓰지 않고 순수 자원봉사에만 의존하고 있어서 시민들의 재능기부가 절실한 형편이다. 대회의 성격과 목표가 믿기 어려울 만큼 진지하고 모범적이다. 행사를 위한 행사가 아니라 ‘세계장애여성 연대기금’을 마련하고 한국에 국제장애여성 네트워크를 설치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향하고 있으니 교과서에 소개해도 좋을 사례다.

 

세계장애여성대회는 2006년 12월 유엔에서 채택된 국제장애인권리협약의 브레인차일드에 해당된다. 이 협약은 국제인권조약의 긴 계보 중 가장 최근에 채택된 국제법이다. 일반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장애인권리협약을 만들던 과정에 한국 장애여성단체들의 활약이 컸다. 협약을 마련하기 위해 국제적 논의와 협상이 진행되던 2004년에 한국 단체들이 장애인권리협약 내에 장애여성을 위한 독립조항을 넣자고 맨 먼저 제안하였다. 애초 외국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특히 유럽 쪽에서는 성별에 따른 별도조항을 두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한국 단체들은 2005년 유엔의 아태경제사회이사회에서도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등 끈질긴 노력 끝에 드디어 협약의 전문과 6조, 16조, 28조에 장애여성을 별도로 언급하는 데에 성공했다. 마침 그 과정에 열심히 참여했던 엔지오대학원의 제자인 활동가가 뉴욕에서 전자우편으로 현지 소식을 상세히 전해 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필자가 아는 한 한국 시민사회운동 전체 역사를 통틀어 국제조약의 성문화 과정에 장애여성단체들만큼 그렇게 철저히, 수준 높게, 구체적인 결과를 낸 단체가 없었다.

 

<도가니> 영화를 계기로 재조명된 장애인에 대한 학대를 접하면서 우리 장애여성들의 공헌에 힘입어 통과된 국제장애인권리협약을 다시 읽어 보았다. 협약 전문의 (q)단락을 보라. “장애여성과 장애소녀들이 가정 내외에서의 폭력, 상해 또는 학대, 방임 또는 부주의한 처우, 혹사 또는 착취에 있어 보다 더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많음을 인정하며”로 나와 있다. 오늘의 사태를 마치 예언이라도 한 듯 전율마저 느껴진다. 한편에서 장애소녀들이 성폭력과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던 와중에 또다른 한편에서는 장애여성들이 이렇게 구조적인 해결책을 국제적으로 제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례는 인권에 있어서의 회복적 모델과 자력화 모델을 각각 상징하면서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준다. 아울러 인권에 관심 있는 개인들, 단체들, 언론기관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잘 시사해 준다. 전자의 경우 고발과 비판이 필요하다면 후자의 경우 격려와 지원과 홍보가 필요하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호소한다. (www.ablewomen.net)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한겨레. 2011.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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