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희망의 정치, 절망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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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1-22 11:09 조회21,87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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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보선 이후 정치권에서 쇄신론이 무성합니다. 한나라당의 홍준표 대표는 중앙당사를 없애는 등의 개혁론을 제시했고, 이른바 쇄신파는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는 연판장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민주당에서도 야권통합과 전면적 혁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그 방법론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권의 이런 움직임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합니다. 기성정치가 외면받게 된 까닭에 대한 깊은 성찰은 보이지 않고, 사적 이익을 대의로 포장하는 꼼수들만 두드러지는 탓입니다.
하지만 정부의 태도에 비하면 정치권은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정부는 민의를 겸허히 수용하겠다며 조아렸던 머리를 들기가 무섭게, 대다수 역사학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과서 집필기준을 개정해 아이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라고 강요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국가이익 침해 내용이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을 친북·반미로 몰아붙이는 폭거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에 대한 환멸을 넘어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행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정치 저 너머에 희망의 정치의 가능성도 보입니다. 최근 서울 노원구의 방사능 오염 아스팔트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노원구와 서울시의 대응이 한 예입니다. 사건은 방사능 위험에서 아이들을 지키려는 어른들의 모임인 ‘차일드 세이브’의 한 회원이 지난 1일 노원구 월계동 일부 도로의 방사능 수치가 높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당국에 신고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이 회원과 당국의 조사를 통해 인공 방사성 물질인 세슘137이 기준치를 훨씬 웃돌고 있음이 밝혀졌고 환경연합은 별도로 인접한 다른 두 곳의 아스팔트도 방사능에 오염됐음을 확인했습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매일 1시간씩 피폭해도 건강에 이상이 없는 수준이라고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주민들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환경연합과 차일드 세이브 회원 등은 대책을 요구하려고 노원구청장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김성환 구청장을 면담했던 김혜정 환경연합 원전특위 위원장은 자치단체장을 제대로 뽑는 일이 왜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구청장은 즉각 면담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겨우 인터넷에 보도가 떴을 뿐인데도 이미 상황 파악을 다 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3개 지역의 오염 상황을 설명하자마자 해당 지역 아스팔트 철거를 약속했습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안전하다고 해도, 주민 불안을 씻어주는 게 우선이라는 거였죠. 구청장은 또 2000년 이후 만들어진 도로에 대한 민관 합동조사를 우리 쪽에 먼저 제의했고 서울시에도 전수조사를 요청하겠다고 했습니다.”
4일 노원구청은 문제의 아스팔트를 철거했고, 이틀 뒤인 6일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오염 현장을 찾아 상황을 확인한 뒤 전수조사는 물론 주민들에 대한 역학조사까지 약속했습니다. 올봄, 같은 아스팔트 오염 문제를 발견한 포항과 경주에선 여태껏 아무런 조처도 없다가 이제야 부랴부랴 아스팔트 철거계획을 내놓은 것과는 딴판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오랫동안 생업을 유지해왔던 주민들은 불안 속에서도 구청과 시청의 이런 발 빠른 대응에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박 시장의 현장 방문 이후 차일드 세이브 카페에는 “시장 한 명이 바뀜으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군요” “시장님이 하시는 말씀, 만에 하나라도 모르니 조사해보라는 내용, 감동입니다” 등 찬사가 줄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박 시장이나 김 구청장의 조처는 “방사능 조사에 대한 공적인 권한과 의무가 없는데도 직접 나서서 측정하고 신고한” 시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들 시민들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래 “우리는 안전하다”는 말만 되뇌며 오히려 원전 확대정책을 밀어붙이는 당국을 믿는 대신 스스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계측기로 무장하고 감시역을 자임했습니다.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희망의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당사를 없애는 따위의 쇼가 아니라, 이렇게 각성된 주인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시민과 그런 시민의 편에서 판단하고 집행하는 위정자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협치의 모델일 것입니다.
권태선 편집인
(한겨레. 2011.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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