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언론의 자기부정, KBS 도청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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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8-12 10:11 조회21,44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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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불행한 일은 추방된 해직기자들이 감옥에서, 거리에서 그래도 끝내 언론인임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데 비해, 언론 그 자체는 그렇지 못한 사실입니다. 경탄할 만한 거대기업으로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언론은 한낱 배타적, 독점적 이권집단일 뿐입니다. 일찌감치 권력에 투항해 기자들을 혹은 축출하고 혹은 매수하면서 권력체제의 일부로 편입되어 온갖 은폐와 왜곡, 선정적이고 상업적인 보도에 급급함으로써 주권자의 시야를 가리고,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며, 권력 지탱의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해온 이들 언론기업들만큼 명백한 자기부정은 없을 것입니다.”
<한겨레> 창간 발의문에서 지적한 언론의 자기부정이 30여년 전 이 땅의 언론에 국한된 일이 아님을, 한국방송의 도청 의혹과 머독의 해킹 스캔들 등 최근 국내외에서 터져나오는 언론의 추문이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아니 어떤 점에서는 오늘의 언론이 무한경쟁을 핑계로 점점 더 뻔뻔하게 사익 추구에 나서고 있습니다.
루퍼트 머독 소유의 타블로이드 신문 <뉴스 오브 더 월드>는 특종을 위해 유명인사들은 물론, 납치된 소녀의 휴대폰 통화 내용까지 해킹했습니다. 수신료 인상에 목을 맨 한국방송은 민주당 당직자회의를 도청한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언론윤리 망각이라는 점에서 두 사건은 비슷하지만, 한국방송의 도청이 사실일 경우, 그 죄질은 더 나쁘다 할 것입니다. <뉴스 오브 더 월드>는 대중지에 불과하지만, 한국방송은 공영방송인 까닭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한국방송의 대응은 공영방송의 그것이 아닙니다. 경영진은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이른바 도청행위를 한 적은 없다”는 궤변을 회사의 입장이라고 내놓고, 도청 의혹 당사자인 기자는 핵심 증거물인 컴퓨터와 휴대폰을 분실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무딘 수사에서조차 그의 진술은 거짓으로 드러났고 그는 피의자 신분이 됐습니다. 한국방송의 도청 연루를 믿는 비율이 사내에서조차 90%를 훌쩍 넘는 형편이니 바깥 여론은 굳이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공영방송은 물론 언론인으로서도 활동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뢰가 추락하는 위험한 상황”이라는 한국방송 새노조 쪽의 진단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한국방송은 머독 제국의 위기 대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뉴스 오브 더 월드>에서 해킹이 문제된 것은 윌리엄 왕자의 음성메일을 해킹한 혐의로 왕실담당 기자와 사설 조사관이 구속된 2006년이었습니다. 당시 조사관의 집에서 수천명의 해킹 명단이 나왔지만, 경찰과 신문사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특히 신문사는 컴퓨터를 파괴하고 내부 이메일 기록을 삭제한 뒤 기자 한 사람의 소행으로 돌려버렸습니다. 그러나 2009년 <가디언>은 이 신문의 도청으로 사생활을 침해당한 축구선수에게 회사가 72만5000파운드(약 15억원)라는 기록적인 액수를 배상했다는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이후 <뉴욕 타임스> 등의 추적보도로 간부들의 인지 아래 해킹이 공공연히 자행됐음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머독 부자는 의회 청문회에 섰고 두 사람은 해킹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강변했습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이미 2008년에 전화 해킹이 광범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증거를 아들 제임스 머독에게 제시했었다고 밝힌 측근들에 의해 즉각 부인됐습니다. 머독은 자신의 제국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쳤지만, 168년 역사의 신문을 폐간하고, 예정돼 있던 방송 지분 인수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고도 시련은 아직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국방송도 계속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다간 이런 전철을 밟기 십상입니다. 설령 증거인멸 덕에 사건이 미궁에 빠진다 해도, 이미 가장 값비싼 국민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신뢰 잃은 공영방송, 그것은 한국방송의 자기부정입니다. 이 자기부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금이라도 새노조의 감사 요청을 받아들여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방송 경영진은 노조를 비난하기에만 급급합니다. 그렇다면, 한국방송 내부의 진실규명 투쟁에 연대함으로써 공영방송을 되살려내는 일은 이제 깨어 있는 시민들의 몫입니다.
권태선 편집인
(한겨레. 2011.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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