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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김진숙, 그녀가 아직도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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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0-19 09:45 조회32,3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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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는 밤새 가을비가 내렸다.

 

팽나무 잎 몇 개가 비에 젖어 벌써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다. 옷장에서 조금 두꺼운 옷을 꺼내 몸에 걸치다 거기 아직도 그녀가 있다는 생각이 이마를 때린다.

 

김진숙 그녀가 아직도 거기 있다. 가을이 왔다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어린 손을 흔드는 코스모스를 예뻐하며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거기 허공에 있다.

 

비가 오면 비에 젖으며 거기 있다. 번개와 돌풍이 지나가면 그걸 그대로 견디며 크레인 위에 있다. 오늘도 거기 있고 내일도 거기 있을 것이다. 꽃이 지는 날도 거기 있었고, 폭염과 폭우가 몰아칠 때도 거기 있었다. 눈보라 몰아치는 날도 거기 있을 것인가? 발가락이 얼어 살이 문드러지는 날까지 거기 있게 두어야 할 것인가?

 

김진숙이 저 차가운 허공에 걸려 있는 동안 나는 가짜다. 김진숙이 하늘 한가운데 매달려 있는 동안 나는 사기꾼이다. 내 시 내 언어는 거짓이다. 김진숙이 가을비에 젖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위선자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뉘우쳐야 한다. 김진숙이 밤의 냉기에 덜덜덜 떨고 있는데 나는 따뜻한 국물이 그리웠다. 나는 하루하루 속물이다. 그대 생각을 하면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잘못했다. 잘못 살았다. 비겁하게 살았다.

 

내려오라, 김진숙.

 

희망은 없다. 이 더러운 땅 어디에 희망이 있는가. 희망 같은 건 없다. 차별은 깊어지고, 격차는 갈수록 더 벌어지며, 내일은 오늘보다 살기가 더욱 힘들 것이다. 발랄해야 할 10대의 일그러진 얼굴 어디에 희망이 있는가? 방황하는 20대 저 가난한 나이 어디에 희망이 있는가?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30대 어디에 희망이 있는가? 쉬지 않고 일했으나 해고의 불안에 시달리고 몸 구석구석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40대 누구에게 희망이 있단 말인가? 벌써부터 노후가 걱정인 50대, 존재감을 잃어가는 60대,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노인들 어느 누구에게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앞으로도 희망은 없다. 이 ×같은 세상 어디에 희망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몸부림치는 동안만 희망이다. 우리가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순간만이 희망이다. 우리가 서로를 부축하며 가고 있는 동안만 희망이다. 거기까지만 가면 희망이라고 믿었던 날들은 갔다. 이 고개만 넘으면 산 너머에서 희망이 우리를 반겨주는 것도 아니다. 내가 우리가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동안만 희망이다.

 

그래 그대가 희망이다. 우리의 사랑, 우리의 희망 김진숙! 그대가 거기 허공과 함께 희망이다. 저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설령 그대가 거기 허공중에서 재가 되어 날아가도 저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다 다시 만찬장으로 몰려갈 것이다.

 

그대 내려오라. 우리 곁으로 내려오라. 우리와 함께 희망으로 있자. 그대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가 이렇게 아프니, 그대는 얼마나 더 아프겠는가? 세상을 향한 그대 사랑을 이 땅이 알고 저 하늘이 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차별받는 이들, 희망이 없는 이들,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정규직 일자리 하나 얻지 못한 채 오늘 하루를 모질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그대를 안다. 그대의 뜨거움, 그대의 연민, 그대의 사랑을 안다.

 

그러니 살아서 내려오라 김진숙!

 

도종환 시인

(한겨레. 2011.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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