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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식] 무산철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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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9-02 16:42 조회22,11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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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중국 동포 두 분을 만났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북에 미쳤다. 마침 탈북자를 다룬 영화 『무산일기』(2010)가 나라 안팎에서 주목된 일도 겹쳐서 그런지, 그중 무산(茂山)철광 이야기가 새삼스러웠다. 지난 2005년 말, 지린(吉林)성의 3개 기업이 그 50년 개발권을 확보했다. 70억 위앤(약 9000억원)을 투자하여 매년 100만톤의 철광석을 생산할 방침이라니 대단한 광산이다. 매장량 30억톤을 자랑하는 무산광산은 세계적인 철광이지만, 함철품위(含鐵品位)가 낮은 빈광(貧鑛)이라 본격적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35년 무렵이었다. 확전을 앞둔 일제는 미영에 의한 철광 수입 제한이란 곤경에서 탈출하기 위해 조직적 채굴에 나서, 무산은 일약 철의 도시로 각광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철광석은 철도를 통해 큰 제철소가 있는 청진(淸津)으로 보내졌고, 여기서 만들어진 강철이 바로 일본으로 건너갔음은 물론이다. 이런 철광을 중국과 합작개발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경제난이다. 한창 경제위기가 고조된 1990년대 후반에는 무산광산도 채굴이 중지될 정도였다. 중국에 의존하면서도 그 예속을 경계하는 북의 모순된 태도를 염두에 둘 때, 2008년인가 중국이 투자를 백지화했다는 보도도 일본쪽에서 흘러나오는 등, 합작이 순조롭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무산철광 개발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난핑(南坪) 곳곳에서 거대한 철도 교각이 목격되었는데, 무산 철광석을 실어나를 허룽(和龍)과 난핑을 잇는 철도가 올 10월 완공 예정이라는 보도다. 난핑은 무산의 맞은 편 북과의 통상구가 설치된 곳이고, 난핑이 소속된 허룽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의 하나다. 이곳에 가본 적이 있는 분들은 금세 이해하겠지만, 두만강은 두 나라를 가르는 경계라기보다는 강 양쪽을 잇는 생활권의 축이다. 국경이 오히려 이 자연스러운 생활권을 분열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데, 북이 몰락하면서 두만강의 긴장이 높아진 것은 반어다. 조선조 말 이후 이 강을 건너간 우리 유이민과 식민지시대 이 강을 중심으로 한 무장/비무장 독립투쟁의 역사를 상기할 때, 무산과 난핑/허룽의 연계가 부자연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난핑-허룽 철도가 완성되면 무산까지 연장하는 공사가 예정되어 있다니, 두만강 양안, 무산과 허룽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질 것은 불을 보듯 환하다. 세종 때 육진(六鎭)이 개척되었지만, 무산은 17세기에 들어서야 이름이 생길 정도로 첩첩산중의 여진(女眞) 변경이었다. 무산이란 이름의 출현은 이 지방에 대한 조선조의 지배력이 비로소 강화되기 시작했다는 뜻일 터인데, 설화 「남평과 로덕」이 흥미롭다. 왕조 말 아내와 함께 도망치던 민란의 두령이 두만강 가에 이르러 포교의 추격이 급해 그만 혼자 중국땅으로 넘어갔다. 조선 포교와 중국 마적의 감시 속에서 부부는 끝내 이산가족이었다. 어느덧 노인이 된 부부는 매일 강 양쪽에서 안부를 물었다. “여보, 로덕이 무사하오?” “네, 남편께서도 무사하신지요?” 이 간절한 인사에서 조선쪽 지명 ‘로덕’과 중국쪽 지명 ‘남평’이 태어났다는 일종의 민간어원설이다. ‘로덕’은 노댁 즉 노친네라는 함경도 사투리고, ‘남평’은 ‘남편’의 와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무산의 영북면(永北面)에 노덕(鹵德)이란 동네가 있다. 비록 민간어원설일지라도 이 설화에는 원래는 하나의 생활권인 두만강 양안이 국경으로 분단되면서 그 주민들이 겪게 된 비통한 경험이 녹아있거니와, 이 점에서 최근의 북중 협력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중국의 변방 연변과 한반도의 변경 함북이 함께 낙후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면 양측 모두에 상생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방향이 북의 개혁․개방을 이끄는 소중한 불씨가 된다면 환영해 마지않을 진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일방성이다. 허룽은 힘이 세고 무산은 약해서 지금으로서는 한쪽에 흡수되는 형국을 면할 수 없다. 이런 비대칭성에서 진정한 협력이 나올 수 없다. 더구나 광산 폐기물로 말미암은 두만강 오염을 비롯해서 벌써 환경문제가 심각한 모양이다. 

지난 7월 중국 외교부는 전격적으로, 50주년을 맞이한 북중우호조약이 앞으로 10년은 더 유효하다고 밝혔다. 이 조약의 정식명칭은 ‘조중우호합작호조조약(朝中友好合作互助條約)’으로 1961년 7월 11일 조인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한미동맹에 대한 짝이다. 그러니 한미동맹처럼 군사동맹이다. 사실 그동안 조중동맹은 거의 헐거워진 상태였는데, 최근 한국에서 부는 신냉전 바람에 슬그머니 부활했다. 신냉전이 자초한 결과 중국에 대한 북의 자주성이 깊이 훼손되고 우리는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로 떨어졌으니, 한심한 일이다. 무산철광 개발이 두만강 양안 모두에 상생적 기획으로 들어올려지기 위해서도, 다시 말하면 남평과 로덕의 진정한 재회를 위해서도, 남북협력이 절실하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지금이라도 늦지않다. 대전환을 마련하자.

최원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 서남포럼 운영위원장)
(서남통신. 2011.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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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식님의 댓글

최원식 작성일

연대 나일성 교수께서 제 글을 읽고 청진을 성진(김책시)으로 교정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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