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뫼비우스의 띠' 닮은 인터넷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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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12-11 11:53 조회21,11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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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가 던진 파문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미국의 외교문건 폭로 이후에도 미확인비행물체(UFO), 러시아, 미국계 은행에 대한 주요 발표가 계속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일종의 미디어 엔지오인 위키리크스가 이번 사건으로 끼친 영향을 단지 극비정보의 공개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본질을 놓치는 것이 된다. 적어도 이번 외교문건 공개에 있어선 그렇다. 예컨대, 사르코지가 성질이 급하고 권위주의적이다, 혹은 메르켈이 우유부단하고 독창성이 없다, 또는 푸틴이 베를루스코니와 가깝다 등등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는 이번 사건에 대해 “미국의 현지 대사관들이 언론의 보도 내용을 베껴 본국 정부에 비밀정보라고 보고해 온 관행이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빈정댄다. 따라서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점은 인터넷 시대에 인간 사회의 무대 전면에서 드러나는 ‘공연’과 무대 뒤에서 행해지는 ‘행위’ 사이의 차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말한 인상관리이론을 뒤집어 놓은 듯한, 곧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현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사건은 내가 이곳에서 맞닥뜨리는 문제의식과도 맥이 닿아 있다. 오늘날 문화, 정보, 지식, 연구에서 점점 더 안과 겉이 따로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곳에서 내가 직접 경험한 바를 들어 보자. 첫째 사례. 한국에서 몇 년 살았던 미국 학생이 독일에 유학 와서 내 수업에 들어온다. 내가 그 친구에게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 사정을 물어볼 때도 있다. 둘째 사례, 남아공과 남한의 시민사회 비교연구에 관심이 있는 네덜란드의 학자가 내게 아주 상세한 한국 사정을 문의하곤 한다. 셋째 사례. 일본학을 전공하는 벨기에 학생이 에라스뮈스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독일 대학에 와 있으면서 내 수업을 듣더니 부전공으로 한국학을 공부하고 싶어한다. 넷째 사례. 유럽의 어느 학자를 만났더니 자기가 한국의 모 선생(내가 가깝게 아는)이 쓴 논문을 세미나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고 칭찬을 한다.
아주 단편적인 사례들이지만 이것을 통해 느껴지는 바가 있다. 문화와 지식에서 어떤 고유한 ‘영토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과거에는 어떤 표현이나 주장이 주로 타깃으로 삼는 청중과 맥락이란 게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글을 쓰면 당연히 한국의 실정을 염두에 두고 한국 독자를 겨냥해서 집필한다라는 무언의 전제가 있었다. 따라서 한국 독자라면 이 정도의 배경지식, 이 정도의 역사지식은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을 거라고 당연시하면서 글을 쓸 수 있었다. 간혹 외국 독자를 염두에 두고 발언할 때에는 사용 언어, 접근 방식, 논리 전개 등이 많이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다시 말해 문화와 지식에서 내수용과 수출용이 뚜렷이 구분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카네기재단에서 동양과 서양의 인권관을 비교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비영어권 국가 내에서 벌어지는 ‘안방용’ 인권 논쟁을 알아내기 위해 외국어로 쓴 수출용 논문이 아닌 자국어로 된 내수용 논문들을 선별하여 번역·소개했던 일도 있었다. 그 나라 사정을 제대로 알려면 진짜 청국장을 먹어봐야지 어디 공항면세점 같은 데서 파는 선물용 과자를 먹는 것으론 미흡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오늘날 문화·지식세계에서 이러한 ‘영토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이제 더는 특정한 타깃 청중과 특정한 맥락을 전제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런 통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한국의 어느 시민사회 활동가가 아이티에 갔더니 현지인이 원더걸스의 노래를 흥얼거리더라고 한다. “어머나, 다시 한번 말해 봐, 텔미 텔미 텔미 유!” 미국의 고등학교로 전학을 간 한국 아이에게 첫날 어느 급우가 이렇게 반갑게 물은 적도 있었다. “너 동방신기 좋아하니?” 한국어로 된 책과 논문을 읽고 뉴스를 이해하는 외국 연구자를 만나는 것이 이제 더는 드문 일이 아니다. 이들은 한반도 분단 상황에,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흥미롭게 병존하는 모습에, 노조를 허용하지도 않는 전근대적 회사가 글로벌 기업으로 행세하는 모순적 현실에, 역동적인 시민사회와 초고속 인터넷이 천지개벽처럼 사회를 바꿔놓는 현실에 깊은 관심을 쏟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제 국내에서 국내 청중을 향해 나온 문화활동과 지식도 전보다 훨씬 더 빨리 외국에 알려지고 비판되고 소비된다. 그러니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제 내수용 지식과 수출용 지식의 경계가 크게 허물어졌다고 가정해야 옳다.
이런 현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 우리의 지식과 문화 현실에서 한국인이 배타적인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믿던 시대는 지났다. 그러기에는 싫든 좋든 우리 덩치가 커졌다. ‘우리의’ 문제이긴 하나 그것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데서 한국인 외의 다른 모든 주체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게 좋겠다. 둘째, 우리 현실을 우리끼리 우리말로 다룰 때에도 좀더 ‘보편적’이고, 덜 자기중심적인 시각에 기대어 발언하고 표현하고 주장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필요할 것 같다. 바깥 눈치와 관계없이 우리 스스로의 업그레이드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현실을 우리 문화계, 특히 출판계가 따라잡아야 한다고 본다. 명료하고 평이하면서도 정확한 한국어로 쓴 텍스트, 전통적 소재가 아니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첨예한 논쟁을 정면에서 다룬 원고, 바깥세계에서도 이해가 가능한 객관성과 비판성이 잘 조화된 논증, 역사적 배경지식이 거의 없는 독자층을 가정해서 친절하게 설명주가 달린 국내 원고를 더 많이 발굴해야 한다. 이렇게 된 한국책이 나온다면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국외의 독자층도 분명 크게 늘어날 수 있다. 이런 기획을 하는 출판사가 있으면 기꺼이 참여할 필자들이 많을 것이다.
조효제 베를린자유대학 초빙교수
(한겨레. 2010.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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