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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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1-03 02:17 조회21,46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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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딸아이가 남산으로 해돋이를 보러 간다고 하자, 남편은 우리도 한강 둔치에라도 나가보자고 했습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둔치에는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와 구름 낀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두 손을 모은 채 무엇인가를 간절히 비는 노부인도 보였습니다. 새해 첫 태양을 기다리던 우리 역시 각자 소망을 안고 마음속에서 합장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소망에 덧붙여 ‘좀더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 같은 공동체를 위한 소망을 하나 더 키워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11년은 우리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해가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지난해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상황 직전까지 갔습니다. 내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쟁의 암운을 걷어내고, 우리의 미래를 맡길 제대로 된 지도자를 찾아내야 할 이 중차대한 시기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할 경우 이 나라와 민족의 명운이 어찌될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던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50여년 전 선생은 <사상계>에 기고한 같은 제목의 글에서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 뜻 깨달으면 얼,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라고 질책하셨습니다.
뜻을 품고, 뜻을 깨닫는 일은 생각하는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생각하는 수고 없이는 누가 진정으로 나와 우리의 삶을 이롭게 할 지도자인지, 어떤 정책이 내게 진정 도움이 되는지, 정치적 선동 뒤에 숨은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연습문제를 하나 풀어보지요. <한겨레> 신년호에 실린 예비 대선주자들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오세훈 서울시장이 ‘강력한 지도력’ 항목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무상급식 문제를 둘러싸고 시의회와 강력하게 맞선 덕 같습니다. 의회가 무상급식 조례안을 통과시키자 오 시장은 이를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맹공하며 모든 정책협의를 거부했습니다. 지난 세밑 의회가 통과시킨 예산안에 대해서도 집행을 않는 것은 물론 대법원에 제소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부자들에게까지 급식을 해서 가난한 이들의 몫을 줄일 수 없다는 게 그의 핵심 주장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오 시장이야말로 서민을 위한 정치인인 듯합니다.
그런데 의회가 통과시킨 예산안을 살펴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오 시장 쪽이 내놓은 애초 예산안에서 의회가 감축한 것은 서해뱃길(752억원)과 한강예술섬(406억원) 등 전시성 사업 예산이었고 늘린 부분은 무상급식(695억원), 학습준비물 지원(52억원), 중증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200억원) 등 복지성 예산이었습니다. 부자 아이들 밥을 먹이려 가난한 이들의 몫을 줄인 게 아니라 전시성 토목예산을 줄여 급식예산은 물론 중증장애인 지원예산까지 마련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 시장의 무상급식 반대의 진실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울 전시성 공사 예산 확보를 위해서 취약계층 예산을 과감히 삭감했던 그는 민주당 주도 의회가 전시성 예산 삭감 의지를 분명히 하자 무상급식을 부자급식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토목예산은 어차피 물건너갈 것이니, 진보진영 대표 정책으로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무상급식을 공격해 한나라당 핵심 지지층의 지지를 끌어모아 대선주자로 각인시키려는 셈법 아니겠어요?
이렇듯 생각의 힘을 작동시키면, 정치적 수사가 감추고 있는 이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주택문제, 일자리문제, 남북문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전면전으로 비화할 수도 있는 남북간의 국지적 충돌을 막고 이 땅에 평화를 가꿔가는 일도, 아이들이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도 우리가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가능한 일입니다. 새해에는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매사를 좀더 골똘히 생각해보는 습관을 들이면 좋겠습니다.
권태선 논설위원
(한겨레. 2011.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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