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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2011년 카이로, 1980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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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2-28 08:49 조회22,5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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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결국 물러났습니다. 외국의 압력에 무릎 꿇을 수 없다며 조기퇴진을 거부한 지 겨우 하루 만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집트인들의 절대다수가 자신을 지지하리란 환상에 매달렸던 그도 충복이었던 군조차 등을 돌리는 상황에선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완강하게만 보였던 30년 독재의 사슬도 도저한 민중의 힘 앞에선 이렇게 맥없이 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랍권의 민주화 도미노를 촉발할, 베를린장벽 붕괴에 비교되는 역사적 드라마를 연출한 이집트인들은 기쁨 속에서도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재자는 떠났지만, 그들이 갈구하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될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는 탓입니다.

 

무바라크가 떠난 이집트의 지금 상황은 철권통치로 한국 민주주의를 질식시켰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불렸던 시기까지의 안개정국과 흡사합니다. 무바라크처럼 긴급조치에 의존해 모든 반대세력을 억누르며 종신대통령의 길을 걷던 독재자의 갑작스러운 퇴장은 민주주의의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분신인 전두환 등은 언론에 재갈을 물린 채 쿠데타를 일으키고, 광주학살을 자행하면서 권력을 거머쥐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시대와 다를 바 없는 폭압으로 민주주의를 유린했습니다.

 

이 폭압의 사슬을 끊어내는 데는 7년이란 세월이 또 필요했습니다. 그사이 수많은 젊은이들이 감옥에 끌려가고, 성고문을 당하고, 고문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희생이 쌓이면서 폭압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도 쌓여갔고 급기야 87년 6월항쟁으로 폭발했습니다. 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감격은 야권의 분열 때문에 군복을 벗은 쿠데타 세력에게 권력을 헌납하는 환멸로 끝이 났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정권교체는 그로부터 또다시 10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습니다. 민주정부 10년 만에 권력을 되찾은 수구세력은 그나마 이룩한 민주주의의 성과를 되돌려 놓았습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시작된 민주화가 이렇게 힘겹게 일진일퇴를 거듭한 것은 87년 체제가 구체제의 청산이 아닌 구체제와의 타협에 터잡은 탓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상황도 80년 한국의 상황보다 나아 보이지 않습니다. 30년이나 지속된 독재로 이집트엔 한국과 달리 변변한 야당세력조차 없습니다.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아므르 무사 등이 새로운 지도자로 거론되지만 그들에겐 뚜렷한 지지기반도 없습니다. 가장 강력한 야권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은 미국의 기피세력으로 지목돼 있습니다. 새로운 대안세력의 구축조차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여기에 미국이란 변수가 있습니다. 이집트에 연간 13억달러나 되는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미국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권을 세우기 위해 벌써부터 분주합니다. 경제원조를 늘리겠다고 밝히는 한편, 주요 인사들은 공개적으로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 확대에 우려를 표명합니다. 이러니 민간정부로의 권력 이양을 지원하겠다는 군 최고위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정권 장악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자칫하다간 시민혁명이 민주적 겉모습으로 치장한 또다른 군사정권을 낳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2011년 카이로에는 1980년 서울에는 없었던 것이 있습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권력의 통제를 넘어설 수 있는 사회적 소통수단입니다. 80년 서울의 봄을 좌절시키는 데는 언론에 대한 철저한 통제가 한몫을 했지만, 지금 카이로의 시민들은 언론통제를 넘어서 정보를 교환하고 의견을 결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그라들고 있던 시위가 이집트의 구글 임원인 와엘 고님의 석방으로 다시 재연된 것처럼, 새로운 소통매체로 무장한 이집트인들이 깨어서 권력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을 경우, 80년 서울과는 사뭇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집트 민주혁명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성공하기를 빕니다.

 

권태선 논설위원

(2011.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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