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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식량과 민주화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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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2-28 09:01 조회22,2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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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튀니지에서 허가 없이 좌판을 벌였다는 이유로 경찰이 모하메드 부아지지라는 노점상의 전재산인 야채와 과일을 압수한 일이 벌어졌다. 이에 절망한 노점상이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지만 그 사건을 보도한 외부 언론은 거의 없었다. 그때만 해도 북아프리카 아랍국가들에서 민주화운동 쓰나미가 밀어닥칠 줄 예상했던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튀니지의 벤알리 대통령과 사치 성향으로 명성이 높던 ‘영부인’ 라일라 트라벨지는 중앙은행에서 금괴 1.5t을 빼돌려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쳤고, 모로코·알제리에서 소요사태가 터졌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예멘과 이집트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들 중 권위주의적인 독재자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미국이 노골적으로 정권을 밀어준 나라가 적지 않다. 부시 대통령의 대테러전쟁 당시 이집트가 테러용의자의 불법 구금, 고문, 포로 이송의 중간기착지로 악명을 떨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처럼 장기집권과 부패·독재가 마그레브 지역에서 정치적 저항이 폭발하게 된 근본원인이지만 이들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표출된 민생 사안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식품 가격의 폭등이다. 이 지역 주민들이 주식으로 의존하는 밀, 우유, 설탕이 근년 들어 천정부지로 뛰었다. 알제리의 경우 서민들의 평균 식품구입비가 가구소득의 70%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식료품 가격이 오르면 봉급을 몽땅 밥 먹는 데 쓰거나 아니면 굶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시위 현장에서 “설탕을 달라!”라는 구호가 등장할 정도였을까. 새해 들어 유엔식량농업기구가 펴낸 자료를 보면 작년 하반기 전세계 식품가격지수가 평균 32% 올랐는데 그중에서도 밀은 84%, 옥수수는 63%, 설탕은 55%나 상승했다고 한다. 사상 최대의 상승폭이다. 높은 실업률에 주곡가까지 오르니 서민들로부터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이건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패턴이기도 하다. 프랑스혁명 당시 앙라제라는 급진파가 내놓았던 선언에도 “곡물가격 통제” 요구가 맨 앞에 나와 있지 않았는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식민지배 당시에 고착된 농업정책과 전력 부족, 영농기술 낙후 등이 겹쳐져 전세계에서 가장 큰 곡물수입 지역으로 전락한 상태다. 게다가 정치적 정당성마저 결여된 정권이 분배 문제를 도외시하니 이런 식으로 상황이 악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들어 왜 식품 가격이 계속 오르는 것일까? 독일에서도 빵값이 올랐음을 피부로 느낀다. 이곳에서 늘 구입해온 식빵의 정가가 얼마 전부터 약 5% 정도 올랐다. 독일은 식량 자급국이었는데 최근 프랑스에서 밀을 수입하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식품비의 폭등을 한 가지 요인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선 식품의 전세계적 수요가 늘었다. 또한 아시아 신흥경제권 국민들의 식단이 변했다. 사람들이 전보다 더 많이 먹는데다, 육류 소비가 늘면서 육류 생산을 위해 가축에게 더 많은 곡물사료를 주니 사람이 먹을 양식이 모자라게 된 것이다. 고기를 먹으려고 밥을 굶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 셈이다. 세계 양곡시장에 개입한 투기세력들의 장난도 큰 몫을 한다. 2008년 월가가 붕괴하면서 투기자본 세력이 2천억달러 이상을 양곡시장으로 옮겨 갔다는 분석도 있다. 양곡가가 대폭 오르면서 메이저 식품회사인 카길이 지난 4분기에 떼돈을 벌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곡물을 연료 생산용으로 전용하는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마 가장 큰 원인으로는 기후변화로 인한 작황의 감소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주요 밀수출국인 러시아가 수출을 중단했고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곡물 생산도 많이 줄어든 상태다. 이런저런 이유로 향후 전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기적 이슈가 식량 확보 문제일 것이라고 내다보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영국의 유수한 국제정치 싱크탱크인 채텀하우스에서 나오는 출판 목록을 살펴보면 식량안보에 관한 보고서들이 요즘 유독 많아졌다. 앞으로 G20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식품가격 안정이라는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다.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

 

우리는 과연 어떤 상태일까. 일부 농산물의 단기적 수요-공급 문제는 나올 수 있겠지만 식량 자체가 부족한 상황은 오지 않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배고픈 문제가 빈곤층 일부에 해당될 뿐이고, 먹는 것보다 다이어트가 더 중요하며, 식량이 필요하면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판 돈으로 외국에서 수입하면 된다고 자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외부강연에 나갔을 때 청중의 연령층이 다양하면 이런 우스갯 소리를 하곤 했었다. “옛날 학교에서 매일 공짜로 나눠주던 옥수수빵을 드신 기억이 있는 분은 손들어 보세요.” 이러면 아주 단칼에 신세대 청중과 구세대 청중을 나눌 수 있었다. 사실 미국공법 480호(정식 명칭은 미국농업수출진흥 및 원조법) 세대에게 배고픔은 그리 먼 과거지사가 아니다. 5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 우리 곁에 있었던 원조 밀가루, 원조 옥수숫가루, 원조 분유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이란 말은 낭만적인 은유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중요한 문제일수록 너무 쉽게 망각하곤 한다. “한국 사회의 10대 과제” 운운하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어왔지만 단 한번도 식량의 안정적 확보가 리스트에 오른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느 경제학자로부터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주식이 제로가 되어도 우리가 죽진 않지만 농업이 제로가 되면 우린 모두 죽습니다.” 따지고 보면 무상급식도, 한반도 평화-대북 인도적 지원도 식량을 매개로 전개되는 논쟁이 아니던가. 근대기획의 큰 문턱을 넘었다고 믿었던 순간 우리는 먹는 문제를 근본적 차원에서 다시 성찰해야 하는 출발점으로 돌아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조효제 베를린자유대학 초빙교수

(한겨레. 2011.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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