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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엠비 이후’의 큰 그림을 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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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5-16 12:57 조회25,3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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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의 한국은 벌써부터 2012년에 관심이 쏠려 있다. 내년의 선거가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엠비 이후’의 한국과 한반도,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의 앞날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하는 2013년 2월부터 누가 후임으로 들어서든 ‘엠비 이후’가 시작된다.
 

문제는 어떤 ‘엠비 이후’냐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3년여 동안이 너무도 힘들기에 ‘누가 된들 이보다야 낫겠지’ 하는 심경으로 무작정 엠비시대가 끝나기만 고대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작은 원(願)으로는 또 한번 낭패하기 십상이다. 이명박시대 한국 사회의 난맥상이 일차적으로는 대통령 책임이요 그다음으로 정권 핵심세력의 잘못이 크지만, 그것이 사태의 전부는 아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대한민국은 독재정권을 끝장내고 민주화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진행하는 시대를 열었는데, 사반세기가 거의 다 가도록 다음 시대로 넘어갈 계기를 만들지 못해서 헤매고 있는 말기적 현실이 ‘엠비시대’이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한국이 이런 말기 국면에 진입한 것은 엠비 이전이었다. 2008년을 ‘선진화 원년’으로 만들겠다는 허황한 공약에 다수 국민이 넘어간 것도 새시대에 대한 갈망이 국민들 마음속에 널리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13년 이후에도 새시대를 열지 못한다면 한국은 지금까지보다 더 끔찍한 퇴행과 추락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단순히 전임자보다 신용있고 품격있는 인물이 집권한다든가, 한때 민주정부를 이끌었던 세력이 재집권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언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이룩해야 할 고비에 이른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2013년 체제’라는 개념을 제시한 적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명칭이 아니라 구체적인 그림이고 그것을 현실로 바꾸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2013년 체제라는 이름에 값하는 ‘엠비 이후’는 어떤 내용을 갖춰야 할까? 우선 우리가 한국전쟁 휴전 이후 늘 꿈꾸어온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드디어 달성하는 일일 게다. 전쟁의 위협 없이 안심하고 사는 것은 물론 군사독재시대 악습들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도 남북한과 미·중이 참여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돼야 한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 줄곧 강조했던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제대로 구현되기 시작해야 한다. 동시에 국정의 목표가 경제성장 자체보다 (적당한 경제성장도 포함된) 국민의 복지로 바뀌는 시대라야 할 것이다. 이는 당장에 복지 혜택을 얼마나 전면적으로 또는 선별적으로 확대하느냐는 문제 이전에,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문제다. 그런 점에서 복지는 당연히 평화문제와 직결되며 교육·환경·노동 등 온갖 분야에서의 획기적 전환과 결합할 때만 의미있는 성취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이명박정부 출범 이래 현저하게 심화된 우리 사회의 내부갈등이 완화되고 ‘사회통합’의 진전이 이룩되겠지만, 이를 위해서도 2012년에 한바탕 격돌은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이땅의 수구세력이 국민의 신뢰를 크게 잃었고 합리적 보수주의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들은 이명박정부 아래서 사회의 유리한 고지들을 더욱 많이 차지했고 국민총소득 중 자신들의 배분을 한껏 높여놓았다. 이런 특권적 지위를 훼손하는 변화에 그들이 쉽사리 동의할 리 없다. ‘친북좌파’와 ‘망국적 포퓰리즘’ 척결을 부르짖는 강경노선을 택하건 ‘따뜻한 보수’를 앞세운 온건책을 택하건 총공세를 벌일 것이며 그 위력 또한 무시할 수 없으리라 본다.

 

격돌의 주요 현장은 당연히 2012년의 선거 공간이다. 그런데 현재 진보개혁세력은 절대적으로 약세인데다 여러 정당으로 갈라져 있고 지지율 1위의 여권 대선후보와 맞먹을 인물도 아직 안 보이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개혁세력끼리 힘을 합치기라도 해야 무슨 가능성이 열리리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실제로 최근의 4·27 선거는 연합정치가 민심의 명령이요 선거 승리의 필요조건임을 확인해주었다. 동시에 후보단일화가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단일화의 과정 자체가 국민을 감동시키고 좋은 후보를 선정하는 결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년 총선에서는 어떤 방식의 연합이 최선일지 다양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연합정치 논의도 4·27을 겪고 나서 좀더 진화해야 할 시점에 다다랐다. 주된 쟁점은 아직도 전면적인 후보단일화는 불가능할 테니까 통합된 단일야당을 만드는 길뿐이라는 입장과, 단일정당은 불가능하니 비슷한 정당들이 통합한 뒤에 남은 당들이 연대해야 한다는 입장 사이의 차이인 것 같다. ‘통합 대 연대’의 논의 자체는 당분간 더 해볼 만하다. 그러나 통합론이라도 예컨대 4·27 재보선에서 연합정치가 안될 것을 전제로 단일야당 건설운동에 매진하자고 했던 경우라면 ‘어차피 불가능’이라는 논법에서는 벗어나야 할 때다. 다른 한편 진보정당 통합을 먼저 해놓고 더 큰 연대를 도모하자는 쪽에서도, 완전한 단일야당이 아닌 ‘통합적’ 수권정당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날 때 이를 무조건 민주당의 몸집 불리기로 매도할 일은 아니다. 그 통합이 민주당을 포함한 참여세력의 철저한 자기혁신을 수반하는 통합인지, 그리고 불참세력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처음부터 설계하는 수권정당인지를 먼저 검증하며 좀 툭 까놓고 토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하나씩만 뽑는 총선이 공동정부 구성을 약속할 수 있는 대선보다 연합정치에 불리한 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확실한 대선후보감을 못 가진 야권으로서는 총선을 먼저 치른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면도 있다. 어차피 연합정치를 않고는 후보가 있어도 승리하기 어렵고 승리한 적도 없는 것이 한국의 정치지형인데, 연합정치가 제대로 결실하기만 하면 대권주자 없이도 의회를 장악할 수 있고, 그랬을 때 국민들은 바로 8개월 뒤에 반대진영의 대통령을 뽑음으로써 국정혼란을 자초하는 것을 꺼리기 마련이다. 아니, 18대 국회 내내 의회가 당연히 수행했어야 할 국정감시 및 독자적 입법 기능이 회복되었을 때 ‘엠비 이후’가 확연히 달라져야 할 필요성이 국민에게 절실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 결과를 위해서도 ‘엠비 이후’에 대한 큰 그림을 먼저 그리는 수순의 묘가 긴요하다. 선거 승리를 위한 정치공학에 너무 일찍부터 몰입하여 협상 자체가 실패하거나 성사되더라도 국민의 감동을 잃어버릴 위험을 피하는 길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은 기형적인 분단국가로 출발했지만 민중의 피땀으로 그런대로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왔다. 이제 또 한번 국민의 힘에 의한 도약을 이룩하여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한 사회의 민주적 개혁작업을 재가동하며 동아시아 지역 연대의 촉진자로 복귀하는 ‘2013년 체제’의 설계를 제시할 수만 있다면, 그 성취를 위한 특정 방법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으며 국민들은 이 기획에 대한 헌신 여부를 정치지도자의 최대 자격요건으로 간주할 것이다. 아니, 그런 큰 원을 세우고 그 실행에 골몰하는 과정이야말로 그가 낯익은 얼굴이든 새로 떠오른 얼굴이든 참된 지도자로 성숙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한겨레. 2011.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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