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프랑스 시위, 문제는 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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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10-25 07:42 조회21,4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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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동안 전개된 시위 양상을 복기해보면 상황이 그처럼 호락호락할 것 같진 않습니다. 시위를 촉발한 것은 연금개편 문제였지만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불러낸 것은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올해 초 사르코지가 연금개편 뜻을 밝혔을 때만 해도 프랑스 분위기는 체념상태였다고 합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사르코지 정부의 부패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면서였습니다. 로레알그룹의 상속녀인 릴리안 베탕쿠르가 2007년 대통령선거 때 사르코지 쪽에 불법 헌금을 현금으로 공여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당시 선거자금 관리자는 연금개편을 지휘한 에리크 뵈르트 현 노동장관이었습니다. 사르코지 집권 초 예산장관이었던 그는 아내를 베탕쿠르의 자산관리인으로 취업시키고 그의 해외 자산은닉을 눈감아줬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또다른 사르코지 핵심 측근인 기 빌덴슈타인의 해외 재산은닉 혐의를 제보받고도 무시했다는 의혹도 제기됐습니다.
감세로 부자들의 곳간을 채워주고 금융위기를 초래한 은행과 대기업에 나랏돈을 퍼부어준 것도 모자라 국고를 책임지는 예산장관이 세금포탈을 방조해 국고를 축냈다는 의심을 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재정위기를 들먹이며 서민 노후생활의 구명선인 연금을 줄이겠다고 나섰습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프랑스 고교생들까지 시위에 참가한 것을 두고 취업도 하기 전에 정년 이후를 걱정한다고 비아냥거렸지만, 고교생과 연금개편 찬성론자들조차 개편안에 등을 돌리게 만든 것은 불의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사회정의에 대한 갈망은 프랑스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신자유주의의 거침없는 질주로 빈부격차 확대는 전세계적 현상이 됐습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기간제 임시직을 전전하며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는 젊은이들이 넘쳐납니다. 가까스로 일자리를 얻어도 일상화된 해고 탓에 노동자들의 삶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오죽하면 미국 노동자들이 정년 연장 반대 시위를 벌이는 프랑스 노동자들이 부럽다고 하겠습니까? 세계의 공장으로 30년간 고도성장을 구가한 중국 역시 격차 확대로 빚어진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포용성 성장’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프랑스 시위의 추이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수십만부씩 팔리는 것을 보면 정의에 대한 갈증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청춘은 늘어만 가는데, 기득계층은 외교부 특혜인사처럼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식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줍니다. 최근 각종 기업 수사에서 확인되듯이, 우리 기업인들은 부를 자식에게 승계시키기 위해 온갖 불법적 수단을 동원합니다. 쪽방 투기로 기층민중의 등을 친 인물이 장관 후보가 되는 기막힌 일도 겪었습니다.
정의의 회복이 프랑스는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긴급한 과제라고 인식한다면 프랑스 시위에서 1980년대 이후 사라졌던 계급투쟁적 구호가 재등장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프랑스 젊은이들이 ‘굴복하지 말라, 계급투쟁이다’라는 문구를 들고 나온 것을, 지금 정의의 위기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계급투쟁의 시대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경고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권태선 논설위원
(한겨레. 201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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