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서] 후꾸오까의 성탄절과 부디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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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2-29 14:09 조회22,07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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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 성탄절이 공휴일인 나라는 우리뿐이다. 일본에서는 물론 이 날이 평일이지만, 잠시 머물고 있는 후꾸오까에서도 성탄절이 요란하게 지켜지기는 매한가지이다. 고급 상점들이 즐비한 시 중심가 텐진(天神)의 곳곳에 세워진 화려한 조명 장식은 오가는 행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분의 탄생의 의미를 기리기보다는 한껏 상업화된 성탄절로 들뜬 이국 번화가를 걸으며 얼마 전 다녀온 소또메의 ‘부디스찬(Buddhistian)’을 떠올렸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세계의 중계항이었던 나가사끼역에서 버스로 한 시간 반 정도 북서쪽으로 가면 도착할 수 있는 작은 바닷가 마을이 소또메(外海)이다. 너른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는 조망 좋은 언덕에 엔또우 슈샤꾸(遠藤周作)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다. 순교와 배교의 의미를 묘파한 그의 소설 『침묵』이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져 한국인 관광객이 가끔 들른다는 그 언덕은 ‘석양의 언덕’(夕陽が丘)이란 지명에 값하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쓰라린 박해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일본 도꾸까와 막부 시절 엄격한 쇄국정책이 추진되면서 그 일환으로 극심한 기독교 탄압이 강행됐다. 기독교인이나 서양 신부에게 자신의 종교를 버리겠다는 뜻을 종용하기 위해 ‘성화 밟기’(踏畵)를 강요했고, 그것을 거부하면 순교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에 달리든가, 온천관광지 운젠(雲仙)의 순교지에서 드러나듯 끓는 유황온천물에 희생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 직면해 일부 기독교인들은 불교에 의탁해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곳에는 긴 박해 기간 동안 불교도로 위장하여 신앙을 지켜오다보니 이제는 가톨릭과 불교가 혼합된 그들만의 종교를 믿게 된, 말하자면 부디스찬---일본에서는 ‘카꾸레 키리시딴’(곧 ‘숨어 있는 기독교인’)이라 불린다---이 아직도 존재한다. 또한, 선교사 쌩 쟝 신부를 몰래 모셔온 신사(枯松神社)도 남아 있다. 소또메는 ‘숨어 있는 기독교인’의 성지이다. 그런 역사 유래가 있어 한국인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순례가 이뤄지기도 한다. (그 일행이 남긴 여행기와 사진은 http://blog.naver.com/hakamlydia 참조)
큐슈지방에서는 그와 같이 불교를 빌어 기독교를 전습해온 유적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나가사끼역 맞은편에 위치한 ‘일본 26성인 순교지’에 딸린 기념관에 소장된 유물, 나가사끼현 지정 보물인 동(銅)으로 만든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상징으로 믿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관음상에서 성모 마리아를 겹쳐 본 유물들도 큐슈 이곳저곳에 있다.
이와 달리 기독교 박해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예 절을 세워 불교도임을 입증한 유적도 나가사끼에서 볼 수 있다. 역 맞은편 언덕에 자리잡은 후꾸자이지(福濟寺)는 일찍이 무역을 위해 나가사끼에 와 거주하던 중국인들이 기독교 신자가 아님을 보여주려고 1628년에 명조의 건축양식을 따라 창건한 것이다. 그 원형은 2차대전 때 안타깝게도 원폭으로 타버렸지만, 전후 30년 지나 거기에 세워진 거대한 원폭 관음상은 시내와 그 너머의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그것은 평화공원의 평화기념상과 더불어 희생자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2대 조형물로 꼽힌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탄생 이후 2천여년 동안 압박과 탄압 속에서도 이교도에 굴하지 않고 부활의 신앙을 지켜온 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그 탄생에 대해 오늘도 새롭게 의미 부여한다. 그런 태도를 갖는다면 소또메에 존재하는 부디스찬이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박해를 피해 절을 찾은 그들이 기독교도임을 알면서도 받아들여준 불교의 포용력도 되새겨봐야 하지 않을까.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용산참사 같은 참혹한 일들을 겪느라 극단적으로 사회가 분열된 한해를 보내는 지금, 나는 불교를 통해 기독교를 지켜온 일본인 신자들의 여리면서도 질긴 믿음과 그들을 감싸안아줬던 불교의 포용력에서 새로운 해를 이끌 깊은 의미를 묻는다. 그러고 보니 나가사끼의 여행에서는 돌아왔지만, 종교의 화해 정신을 탐구하는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
(서남통신. 2009.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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