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식] 덕혜옹주라는 풍향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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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3-07 11:05 조회22,54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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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독서계에 기이한 바람이 분다. 낯선 작가의 장편소설 『덕혜옹주』가 기세등등하던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의 『1Q84』를 젖히고 매장을 지배한 것이다. 처음에는, "비참하게 버려진 조선 마지막 황녀의 삶을 기억하라!"는 카피만 보고 지레짐작으로 '아이구, 또야...'하는 심정이었다. 올해가 대한제국이 지도에서 지워진 지 백년이 되는 해이니 또 반일감정을 덧들여 책장사를 할 모양이군, 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신문에 실린 작가 권비영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손쉬운 '일본때리기'를 의도한 것은 아니란 기대를 해도 좋을 듯 싶었다. 겸사겸사 책방에 들러보니 정말 이 소설이 무더기무더기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소박한 표지에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자랑하는데도 왜 이처럼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가?
작가후기를 들쳐보고, 이 소설이 혼마 야스꼬(本馬恭子)의 『토꾸에히메(德惠姬)』(일본에서는 1998년에 출간되었고 한국에서는 2008년에 번역되었는데, 소설이 주목되는 바람에 이 책도 다시 나간다니 좋은 일이다)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한일 양국에서 망각된 옹주의 비극적 일생을 따듯하지만 엄밀한 눈으로 추적한 일본 여성학자에 대한 경의와 또 그만큼의 부끄러움을 솔직히 토로한 작가의 충정이 미쁘다. 덕혜옹주(德惠翁主)를 찾아가는 혼마의 여정은 또한 한국에서 왜곡된 채 유통되기 일쑤인 그 일본인 남편 소오 타께유끼(宗武志) 백작의 이미지를 교정하는 길이기도 한데, 권비영은 혼마의 탐색을 대폭 수용하였다. 조선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대마도(對馬島) 도주(島主)의 후예라는 사실도 흥미롭거니와, 동경제대 출신의 교양인으로 고뇌한 소오 백작의 실존이 나름대로 드러난 것이 종요롭다. 권비영의 작업이 혼마의 호소에 대한 화답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에 대해 한국 독자들이 지지를 보내는 뜻이 예사롭지 않다. 더구나 이 소설의 주된 독자층이 2,30대에서 4,50대에 이르는 여성임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에 작동하는 여성적인 것의 한 자락이 보이는 듯도 하다.
적지 않는 분량이지만, 어려운 작품은 아니어서 틈틈이 읽어도 곧 독파할 수 있을 만큼 중간소설로서 손색이 없다. 작가가 설정한 허구들, 특히 조선인 약혼자 김장한이 옹주를 구하려 활약하는 이야기의 진실성 여부가 금세 들통나는 미숙함 대신, 옹주의 귀국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약혼자의 형 김을한(金乙漢) 기자를 비롯한 이 가족 이야기에 충실했더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은 없지 않지만, 왕실문제를 돌아보게 된 것도 수확이다. 우리에게는 영국이나 일본처럼 골치아픈 왕실문제가 부재하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편임에도, 일제의 강압적 결혼정책으로 훼손된 황실사람들에 대한 한국정부, 특히 그들의 귀국을 끝내 저지한 이승만(李承晩)정권의 각박함이 새삼 눈에 띤다. 1962년에는 덕혜옹주, 이듬해에는 영친왕(英親王) 가족을 고국으로 초청한 박정희(朴正熙)의 조치는 비록 정치적 계산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평가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옹주는 물론이고 영친왕과 리 마사꼬(李方子) 비(妃), 역시 일제라는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아닌가? 그들에게 허여된 만년(晩年)이 그래도 다행스럽다고 나는 안도한다.
아울러, 국가폭력이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욱 가혹하다는 점, 황실의 여성도 예외는 아니라는 점, 아니 국가를 태생적 낙인으로 짊어진 황실 여성들, 그것도 격동기의 경우 더욱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는데, 예전에도 한국독자들은 황실남자들보다 황실여성들의 비운에 훨씬 예민했던 터다. 영친왕의 비로 간택되었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파혼당하고 일생을 음지에서 살아간, 마사코는 차치하고 덕혜만큼의 만년도 허락되지 않은 민갑완(閔甲完)의 자서전이 바로 옹주가 귀국한 해에 출간되어 독자들을 울렸던 것을 상기하면, 덕혜옹주 바람은 낯설지 않다. 물론 반일감정이나 궁중에 대한 선망도 한몫 했을 것이지만, 이 붐은 기본적으로 여성주의 텍스트가 아닐까? 옹주의 삶을 파멸시킨 일제에 대한 항의의 형태를 취했지만 그 속내는 여기서 그치지 않을 터인데, 새삼 혼마 야스꼬의 나지막한 발언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린다.
'일제'는 정말 멸망했을까요?(...)덕혜옹주의 불행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일본의 현재모습에 대한 엄격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일본인은 한국인과 공통의 입장에 서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함께 싸우는 것이 가능하게 되겠지요.(「저자후기」)
그렇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의 표상이 '일제'라면, 그 망령은 오늘의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도 있다. 일본인 여성학자와 한국인 여성 작가의 교통 속에서 홀연 일어난 덕혜옹주 바람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걸린 풍향계다, '일제'와 그 후신들에 대한 공동의 저항이 20세기와는 다른 한일관계로 가는 출구임을 절실히 알리는.
최원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장)
(서남통신. 2010.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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