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어둠 속에서 지혜롭게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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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1-04 09:59 조회22,4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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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되는 날, 사람들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기 위해 바다로 산으로 몰려갑니다. 어둠의 깊은 궁창을 지나 은은한 잿빛, 희미한 허공 위로 해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일출은 빛이 어둠을 뚫고 올라오는 모습이면서, 동시에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이기고 새롭게 탄생하는 거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올 한 해도 저렇게 어둠과 두려움과 혼돈을 이기고 밝고 환하게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소망이 그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인류에게 어둠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어둠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온 경로가 문명의 역사였습니다. 어둠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밤에는 달과 별에 의지하고, 낮에는 해에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우리의 민담 <해와 달>은 어둠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고개 너머 마을로 남의 집 일을 하러간 어머니는 누가 와서 문 열어달라고 해도 함부로 열어 주지 말라고 당부를 하면서 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어머니, 기다리는 어머니는 다섯 고개를 넘어오는 길에 호랑이에게 갖고 있는 떡을 다 빼앗기고, 치마 저고리를 벗기우고, 팔다리까지 하나씩 앗긴 다음에 죽고 맙니다.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지만 아이들은 호랑이에게 속아넘어 갑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아이들은 호랑이가 하는 짓을 보고 저건 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아그덜언 밥얼 먹고 자넌디 자다 들응께 어매넌 자지 않고 멋얼 오독오독 깨물어 먹고 있었다. “어매 멋 먹어? 나좀 주어” 헝께 “장재네 집이서 괴기 뻽다구럴 주어서 먹고 있다.” (……) 아그덜이 봉께 사람 손구락이거던. 아그덜언 깜짝 놀래각고 저건 어매가 아니고 호랭인가 싶어서 도망칠라고 한 꾀럴 내각고, “어매 어매 나 똥 매러” 힜다. 호랭이넌 방이다 누라고 힜다. “구렁내가 나서 못써.” “그럼 마롱이다 누어라.” “나가다가 볿으면 어쩔라구.” “그럼 토방에다 누어라.” “사람덜이 볿응께 안 되어.” “그럼 마당에다 누어라.” “마당이다 누먼 집 안이 더러워져.” “그럼 칙간에 가서 누어라.” “응 그려” 허고서 아그덜언 방이서 나와각고 칙간에넌 안 가고 시암 가상에 있넌 노송나무에 올라가 있었다. (임석재 <한국구전설화>, 김환희 지음 <옛이야기와 어린이책>에서 인용)
엄마 같으면 자식들 두고 혼자 무얼 먹을 리가 없지요. 게다가 사람까지 잡아먹다니 그건 엄마가 아니지요. 엄마라면 마루건 토방이건 아무데나 똥을 누라고 하지 않지요. 엄마가 하는 짓을 보고 아이들은 저건 우리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호랑이에게 속았다는 걸 안 뒤에 오누이가 보여주는 침착한 태도입니다. 긴장된 순간에도 오빠는 침착하게 머리싸움, 기싸움을 합니다. 호랑이 곁에서 살아서 나가기 위해 배짱 좋게 말을 걸고 여유를 잃지 않고자 합니다. 해학과 지혜로 승부를 거는 거지요. 호랑이는 자기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방안에서 똥을 누라고 하지만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토방과 마당으로까지 양보를 얻어내고, 호랑이의 시야를 벗어날 수 있는 칙간까지 허락을 받아낸 뒤에 방에서 나와 소나무로 올라갑니다. 공포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 했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뒤에 하늘에 대고 구원의 밧줄을 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침착하게 위기를 벗어나는 정중동의 지혜를 지닌 민중의 자식들입니다.
어둠이라는 두려움과 속았다는 위기감과 호랑이라는 공포와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절박함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생존의 철학이 <해와 달> 이야기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 위기의 시간을 겪고 난 뒤에 호랑이에게서 벗어난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었다고 합니다. 해와 달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제의를 거쳐 하늘로 올라가 어둠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해와 달은 빛이고 밝음이면서 생명이고 지혜입니다. 공포의 대상인 호랑이도 어수룩한 데가 있는 거라고 일러주고, 우리를 속이고 해치려고 하지만 자기 꾀에 넘어가기도 하는 존재가 호랑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나라 민화 <까치와 호랑이>에 등장하는 호랑이들이 익살과 해학을 바탕으로 그려져 있는 것도 맥락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동안 속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위기 중의 위기라고도 합니다. 하는 짓을 보고 난 뒤에 큰 일 났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러나 열어주지 말아야 할 문을 열어준 것도 우리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지혜로워야 하고 침착해야 하며 여유를 잃지 말고 웃으며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도 우리에게 새 밧줄을 내려 주실 것이고 해와 달도 우리 편이 되어 도와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나쁜 호랑이만 있는 게 아니라 잡귀잡신을 막아주는 좋은 호랑이도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도종환|시인
(경향신문, 2010.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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