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치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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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12-07 12:47 조회4,58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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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 | 사회학자
“여기 정의로운 한 남성이 있다. 복잡하고 차별이 가득한 이 사회에 궁금증을 가득 품은 채 사회학자라는 가히 멋진 꿈을 갖고서, 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불평등과 싸우며 치열하게 살아온 남성이. 살아 있는 사회 교과서, 사회학자 노마와 진행했던 인터뷰를 적어 내려본다…”
첫 구절부터 빵 터졌다. “여기 정의로운 한 남성이 있다”니 이 무슨 닭살 돋는 문장인가. 내가 꽤나 으스댔나 보다. 키득키득 단숨에 읽었다.
얼마 전 동네 협동조합의 책방지기로 일하던 날이었다. 책방 인턴이 된 학교 밖 청소년 ‘영아’가 인터뷰를 부탁해왔다. 책방 대표활동가 ‘마담’이 동네 사회학자 ‘노마’가 얼마 전 낸 책을 읽고 인터뷰하라며 숙제를 냈단다. 인터뷰는 책이 다루는 일제 시기를 넘어 1980년대로, 동네살이로, 가족 고민으로 종횡무진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을 진짜 겪었다니 놀랍다며 연신 감탄해주는 열여덟살 청소년의 리액션에 주책없이 들떴다. 그 흔적이 고스란히 녹취록으로 조합 단톡방에 올라온 것이다. 칭찬에 취해 춤추는 고래 한마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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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대학을 사직한 뒤 내 생활의 중심은 동네책방이 됐다. 이웃이 함께하는 작은 협동조합이다. 처음 커피숍 한구석에서 시작했을 때는 2년이면 갹출한 종잣돈이 떨어지려니 했는데 그만 순이익 20만원(!)이 남았단다. 그참에 조합원을 늘리고 확장 이전도 했다. 해마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인 출판과 서점 업계다. 그 저변에 동네책방이 있다. 책만 팔면 인건비는커녕 월세도 못 낸다. 도서관 납품, 북토크와 교양 강연은 기본이다. 시, 글쓰기, 독서, 마을잡지 기자단 등 온갖 모임을 진행한다. 동네 자영업자들과 협력하고 이웃이 주인공이 되는 프로그램도 만든다. 책방이 운영비와 상근 직원의 인건비를 그럭저럭 감당하는 것은 이런 발품 덕분이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며 조합원들은 무보수다.
며칠 전 심야책방 프로그램도 그랬다. 클래식 음악가들과 사진활동가가 슈베르트의 청춘과 청년 노동자 김용균의 삶을 엮었다. 청중의 목소리와 사진을 담아 즉석에서 영상으로 구성하는 참여형 프로그램이었다. 노동자의 삶과 음악, 문학, 그리고 사진이 연결되는 체험을 한 참가자들의 후기가 아프고 따뜻하다.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는 조합원들이다.
공공 지원 프로그램 대부분은 책방에 인건비도, 공간 사용료도 주지 않는다. 외부 작가, 강사, 연주자 사례비 등 실비만 지원한다. 책방은 기획, 공간, 노력을 제공하지만 대가는 없다.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활동에 대한 지원의 기본구조가 이렇다. 인건비가 없고 이익도 못 낸다. 공공이 할 일을 외주로 값싸게 해결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우리 책방을 생계 모델로 홍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적 가치의 생산에서 의미를 찾을 뿐.
반면 사회적기업 지원 같은 인건비 지원 프로그램은 이익 창출이 강조된다. 우리 책방도 예비 사회적기업으로서 3년간 인건비 일부를 지원받았다. 끊임없는 수익 창출 요구 탓에 연장 지원을 하지 않았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적기업 지원의 중요한 잣대가 경제적 가치의 창출이라니.
한술 더 뜨는 이들도 있다. 얼마 전 <조선일보>에 ‘세금으로 운동권 카르텔 지원, 반사회적인 ‘사회적 경제 3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다. 사회적 경제 3법이란 사회적경제기본법, 사회적가치기본법, 사회적경제판로지원특별법을 말한다.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법안이다. 기사에 따르면 사회적기업이나 각종 조합은 시민단체가 세운 곳이 많으니, 결국 세금으로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특혜 3법’이라는 것이다. 기업은 자기 힘으로 이익을 낼 수 있어야 존재 가치가 있는데, 이익도 못 내고 사회적 가치 운운하면서 국민 세금 따먹으려는 반사회적 행태라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보수언론과 재계는 사회적 경제 3법이 반시장적 사회주의 법안이라며 줄곧 반대해왔다.
기업은 자기 힘으로 이익을 내야 존재 가치가 있다면 진즉에 없어졌어야 할 곳은 재벌기업이다. 오래도록 이익을 못 내도 망하기는커녕 천문학적인 특혜를 받았다. 재벌이 “국민 세금 따먹으며” 공룡으로 크는 동안 사회적 경제는 억압됐다. 농·수·축협 등 관변조직 성격의 여덟가지 협동조합 외에는 아예 설립이 금지됐다. 유엔 ‘세계 협동조합의 해’였던 2012년에야 비로소 금지가 풀렸다.
2014년 새누리당, 새정치민주연합, 정의당 등 여야 국회의원 142명이 사회적경제기본법을 발의했다. 다른 두 법도 그 무렵 발의됐다. 이념 공세에 아직도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 부문에 고용된 유급 노동자는 2016년 기준 0.82%, 한줌도 못 된다. 유럽연합은 2015년 기준 유급 노동자의 6.3%가 사회적 경제 부문에서 일한다. 북서유럽 나라들이 비중이 높아 10%에 육박하고, 사회주의 시절 협동조합이 억압된 동유럽 나라들은 1~2%대로 한국과 비슷하다. 미국은 2019년 기준 전체 사적 영역 노동력의 10.2%가 비영리 부문에서 일한다. 한국 재계와 보수언론의 논리대로라면 유럽과 미국은 빨갱이 천국이다.
사회적 경제는 자본주의를 대체하지 못하지만, 그 탐욕이 낳는 비극은 조금 제어한다. 재벌처럼 ‘터무니없는 특혜’를 바라는 게 아니다. 억압됐던 시간을 약간 벌충할 ‘온당한 지원’을 바란다. 우파 시민단체도 많이 참여하면 좋다. 나는 우파가 만든 협동조합 유튜브에 출연해 협동조합의 필요성에 함께 공감한 적도 있다. 고마운 일이다. 사회적 경제에도 정치가 스며들 수 있다. 일부 언론매체가 정치에 물드는 것처럼. 그래도 서로 협력할 수 있다. 모든 걸 이념으로 재단하는 것만 경계하면 된다.
코로나19 시절 책방은 갈 데 없던 동네 청년들이 모이는 아지트가 됐다. 20대 조합원 ‘뭐하’는 토요일 밤마다 책방에서 바를 열고 청년들과 어울리며 일을 꾸민다. 상근직원이 이주민이다 보니 이주민과의 접촉면도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 학교 밖 청소년 영아는 마을잡지 기자단에 합류했다. 돈은 안 되지만 약한 사람들이 서로 돕고 있다.
영아는 인터뷰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비록 지금은 사회학자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작은 책방의 일원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책방 일원으로서의 삶이 더 재미있다는 노마의 얼굴을 보면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보고 있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미소를 보니 지금 이 생활이 정말 즐거운가 보다.”
내가 즐거운 건 영아나 뭐하 같은 청년들과, 이웃과 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이 하는 일, 함께하는 삶의 가치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치가 없겠는가.
조형근 사회학자
한겨레신문 2022년 1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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