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스물일곱 내내 아팠습니다, 그리고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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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03-06 18:10 조회3,80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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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병후 이행하게 된 ‘판단중지’
어둠 속 되뇐 ‘시인이 되고 싶다’
상습적으로 응급실을 방문하는 환자로 분류되자 어떤 의사는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물었다. 철학과 박사과정에 다닌다고 하자 중요 단서를 찾은 탐정의 미소를 지으며 심인성 질환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시는 건 어때요?” 철학과 심인성 질환이 대체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제대로 먹지 못해 나는 심각하게 말라갔다. 기운이 없어서 걷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위장 때문은 아닐까. 소화력이 좋아지면 좀 나아질지도 몰라. 온갖 종류의 자가진단을 하다 소화제를 처방받을 요량으로 동네 내과에 갔다. 대기실은 작고 한산했다. 의사는 짧게 문진을 한 뒤 방금 촬영한 엑스레이 필름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아, 환자분. 저기 보이시죠. 심장 위부터 목까지 보이는 저거. 종양 같아요. 어서 큰 병원 가셔야겠네요.”
그랬다. 내 심장 위 ‘종격동’이라는 곳에 10㎝의 신경종양이 계속 자라고 있었다. 그동안 다녔던 종합병원 흉부외과에 가서 동네 의사의 소견서를 전하고 응급실에서 늘 했던 검사를 받고 나니 그들이 그렇게 진단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 병의 대표적 증세는 가슴 통증, 호흡곤란, 그리고 삼키기 곤란입니다.”
이 커다란 종양을 그들은 왜 보지 못했을까? 그들은 나태하지 않았다. 진료차트에 지나치게 충실했을 뿐. 그들은 심장병의 관점에서만 모든 증상을 바라보고 연결 짓고 해석했다. 그래서 심장 위쪽에서 그토록 자기 존재를 과시하며 하얗게 반짝이고 있던 종양을 볼 수가 없었다.
현상학자들은 선(先)이해가 순수현상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어떤 현상을 제대로 체험하려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관념이나 판단들에 괄호를 치고 에포케(epochē)를 실행해야 한다. 에포케는 일상적 판단에 대한 확신을 멈추는 것, 즉 판단중지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곧바로 수술을 받고 옮겨진 병실에 누워 나는 에포케를 수행했다.
최대한 빨리 논문을 쓰고 박사과정을 끝내고 안정된 직업을 갖겠다는 나의 생각, 돈을 벌어 엄마의 가슴에 훈장처럼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내 믿음을 괄호 치면 내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구에게도 무해한 생각과 신념이었다. 그 믿음이 실현된다고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괄호 치자 마음의 고요한 어둠 속에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열정이 작지만 환하고 순한 반딧불이처럼 날아올랐다. 나는 정말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모든 통념에 괄호 치는 사람, 통념이 지워진 자리에서 사물과 다른 이들이 어떻게 제 존재를 그들만의 고통과 기쁨 속에서 드러내는지 명징하게 볼 줄 아는 사람. 시인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첫 책은 2003년에 출판한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는 잊고서 나 자신에게 드러나는 방식대로 봄, 슬픔, 자본주의, 혁명 같은 단어들에 담긴 계절과 마음과 사회의 현상을 정의해보고 싶었다. 단식하는 광대같이 말라가면서 응급실에서 배웠던 에포케의 미학이 나를 첫 책으로 이끌었다. 진은영 시인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는 매일매일 증오했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었다, 우리는 매일매일 슬펐다…. 이런 거 말고 다른 종류의 말 잇기는 불가능할까. 우리는 매일매일 사랑했다, 매일매일 어울렸다, 매일매일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을 발명해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의기양양하게 시 속을 돌아다니던 시간. 가끔은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문학과지성사(2008)
훔쳐가는 노래
마거릿 애트우드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죠?’라는 에세이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그저 작가 나부랭이, 남의 보석을 훔치는 좀도둑,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 끼어드는 참견쟁이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는 작가 나부랭이로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세 번째 시집을 엮는 동안 나에게도 비슷한 자괴감과 고민들이 찾아왔다. 창비(2012)
문학, 내 마음의 무늬 읽기
사람은 종종 자기 건강에 대한 절망을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착각한다는 것. 내가 그랬다. 그러니 우리가 몸과 마음을 잘 돌볼 줄 알게 되면 깜깜한 세상으로 걸어 들어갈 용기가 생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의사가 아니라 시인이니까 문학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이런 책은 절대 혼자 쓸 수 없지. 그래서 친구와 함께 썼다. 김경희 공저, 엑스북스(2019)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학생들에게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거리’에 다녀와 감상문을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다들 그곳에 다녀와서 무척 슬퍼했다. 오래된 거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무언가는 오래된 거리처럼 남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야 가장 큰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견딜 수 있다. 나의 가장 오래된 거리는 문학이다. 문학과지성사(2022)
진은영 시인
한겨레 2023년 3월 3일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819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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