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경]2023년 우토로에 필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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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05-30 15:32 조회3,41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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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일본 오사카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재일 코리안과 관련해 두 가지 크게 기념할 만한 일이 있었다. 첫번째는 4월29일 재일 코리안이 많이 모여 살고, 과거 ‘조선시장’으로 알려졌던 코리아타운 상점가를 형성하고 있는 오사카 이쿠노구의 이카이노 지역에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이 개관한 일이다. 한류 열풍 속에서 연간 200만명 이상이 방문한다고 하는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에는 거대 공업도시인 오사카에서 살 길을 찾기 위해 넘어간 조선인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은 곳이다. 특히 한때 제주도민 4분의 1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고, 재오사카 조선인의 60%가 제주 출신이라고 할 만큼 제주와 관계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역사자료관에는 일제강점기부터 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형성된 코리아타운의 역사와 관련된 사진, 한국과 재일교포 관련 문헌·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입구에는 김시종 시인의 ‘헌시’를 새긴 ‘공생의 비’가 세워져 눈길을 끌고 있다. 고사와 함께 풍물 소리에 떠들썩하게 치러진 행사는 일본 사회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 살아온 이들에게는 감개무량한 자리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또 다른 기념할 만한 일은, 4월30일에 우토로 평화기념관이 개관 1주년을 맞은 것이다. 오사카와 교토 사이, 우지시에 있는 우토로 마을은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팀의 방문 이후 한국 대중에게 ‘마지막 조선인 강제징용촌’으로 꽤 알려진 곳이다. 복잡한 사정으로 이곳 주민들이 퇴거 위기에 놓인 사실은 2004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까지 상·하수도조차 정비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던 우토로의 주거환경은 조선인 차별의 상징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다 한국 정부의 재정지원과 한·일 시민들의 연대로 토지 일부를 매입하는 데 성공했고, 주민들은 우토로 마을에 새로 지어진 공영주택에 입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주민들이 살던 마을 자체는 원형을 잃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이에 따라 우토로 마을의 역사와 거기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삶, 그리고 우토로를 지키기 위한 투쟁과 연대를 기억하기 위해 기념관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본 청년의 방화 사건까지 겪으면서 지난해 개관한 우토로 평화기념관은 개관 당시의 우려와는 달리 일본인 자원봉사자들의 지원이 끊이지 않았고, 지난 한 해 동안 1만3000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2023년 우토로에 필요한 것’이란 칼럼 제목이 한·일관계의 경색이나 파행 속에서도 두 나라 시민들이 쌓아올린 연대의 힘이나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관심과 연대는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우토로 평화기념관에서 들은 이야기는 분명하게 결이 달랐다.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우토로는 1941년 교토비행장 건설이 계획되면서 많은 조선인이 건설 노동자로 모이게 된 곳이다. 비행장에서 일하면 징용을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사람들을 비롯해 식민지배 속에서 피폐해진 삶의 다양한 사연들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종전(終戰)으로 비행장 건설이 중단된 뒤에는 빈곤과 차별 속에서 살아온 곳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 우토로 주민들의 퇴거를 밀어붙이는 일본인들이 내세운 근거이기도 했다. 평화기념관의 김수환 부관장은 “선량한 일본인들일수록 단순한 강제동원 논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강제동원에만 매달리게 되면, 일본 식민지배 아래에서 이뤄진 경제적 수탈이나 차별이 잘 드러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너무 쉽게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는 선량한 의도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합법과 불법의 경계 속에서 살아가는 빈곤한 사람들의 사정을 제대로 헤아리지 않은 채 쉬운 범주화를 통해 공감한다는 자기만족에 그치기 쉽다. 강제로 동원된 사람만이 피해자이고, 피해자는 강제로 동원된 것임이 분명하다는 ‘선량한’ 인식은 지금까지 우토로 주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아 투쟁하기 어렵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곤 했다. 일본 사회에서 코리안들의 지위가 올라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역사부정론자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우토로에 정작 필요한 것은, 나와 다를 수 있는 삶이나 문제의 구조를 상상하고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문제의 복잡함을 외면한 채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단단한 지지와 연대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영경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세교연구소 소장
경향신문 2023년 5월 2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502030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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