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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법과 문학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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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07-10 19:42 조회3,1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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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의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이 얼마 전 서울을 다녀갔다. 21년 전의 부커상 수상자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 지도자가 문학을 읽지 않으면, 그들이 주장하는 꿈은 최악의 악몽이 될 수 있다.” 특정 정치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전이 어디서 나오는지 물어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한 문학의 호소였다. 그는 2007년부터 4년 동안 당시 캐나다 총리 스티븐 하퍼에게 문학 작품을 추천하는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내기도 했다.


마텔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정치와 문학’이란 것도 등장할 만하나, 조짐은 없다. 현실의 정치인들은 정적을 향해 비아냥거릴 때 소설이란 용어를 이용할 뿐이다. 이전부터 커리큘럼화한 것으로는 ‘법과 문학’이 있다. 독일과 미국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논의해 왔다. 국내에 한정해서 보자면, 동국대의 장경학이 《법률 춘향전》을 낸 것이 1970년대 초반이고, 미국서 귀국한 안경환이 서울대 법과대학에 법과 문학을 개설한 때는 1989년이었다. 그의 저서 《법과 문학 사이》 이후 법과 문학은 부분적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듯했다. 고려대에서 ‘문학 속의 법’이라는 교양필수 과목을 열었고, 제주대에서 이소영이 ‘법과 사회’ 시간에 법과 문학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NGO학이 그랬듯, 한때의 유행처럼 법과 문학의 열기는 잦아들었다. 법학전문대학원 출신 법률가들이 배출된 이후로, 대학의 법과 문학 강의는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1995년에 출간한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가 2013년에야 번역된 일은 뒤늦은 감이 있었다. 제목부터 문학이 법학이나 법률가들에게 끼칠 영향력의 핵심을 담은 듯 보였다. 법률가는 문학을 통해 공적 상상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므로, 입법과 정책 수립과 재판의 길잡이가 된다. 세상을 상상하는 데 다른 방식보다는 소설 읽기가 우월하다. 다만 상상력은 엄격한 헌법적 범위 이내로 제한된다. 요약하면, 구체적 사실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이해하고 시적 정의로 귀결시킨다는 취지였다.
법과 문학의 총론적 가치는 그런대로 짐작하지만, 어떻게 기능을 발휘하는지 각론에서는 석연찮았다. ‘법과 문학 사이’에서 ‘과’ 외에 아무런 구체적인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학문적 분과성과 독자성을 확보해 보고자 고려대의 형사법학자 이상돈은 "법문학", 서강대의 문학평론가 김경수는 ‘문학법리학’이란 용어 사용을 시도했다. 그에 비하면 누스바움은 과감하게 단정에 가까운 결론을 제시했다. “문학적 재판관은 비문학적 재판관에 비해 총체적 사실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정말 그런가? 일반인은 모르되, 법률가들 중 금방 수긍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학의 일반적 기능이야 원래대로 늘 유지되겠지만, 문학이 법률가의 자질을 향상하고 소설만이 최고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누스바움을 비롯한 법과 문학 지지자들이 신뢰하는 ‘감정이입을 통한 다양한 입장의 대체효과’는 밀란 쿤데라도 멋지게 지적한 바 있다. "소설은 자기 것과는 다른 진실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하지만 과학 기술과 디자인의 결합처럼 구체적 효과를 극적으로 보여줄 가능성은 아직 없다.
법과 문학은 법철학과 유사한 운명에 처한 것 같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자본주의 약점을 꿰뚫는 마르크스주의처럼 탁월하나,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마찬가지다. 단테를 읽고 철학을 공부한 피아니스트에게 박수를 보내듯, 법률가들은 언제나 가끔 소설을 펼친다. 능력 향상의 기대는 하지 않으면서.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공동 편집인

법률신문 2023년 6월 29일

https://www.lawtimes.co.kr/opinion/188702?serial=188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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