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 김대중과 한국형 사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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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8-24 21:48 조회33,4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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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논란 속에서 살았다. 한편에서는 그를 '전라도 빨갱이'로 음해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주의자로 비판하기도 했다. 점잖은 척 하는 이들은 "한국은 경제는 일류, 정치는 삼류"라고 하면서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한국 정치를 통째로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는 아직 김대중을 전면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수입된 '이론'은 현실파악 한계
굳이 따져서 말하자면, 개념 또는 언어의 낙후성, 사회과학과 언론의 후진성을 먼저 거론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근대와 탈(脫)근대에 복합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21세기의 시대적 과제가 눈앞에 있다. 과거의 수입된 사회과학 개념만으로 김대중과 한반도의 현실을 직시하기는 쉽지 않다. 일각에서 벌어지는 전근대적인 언어전쟁이야말로 삼류나 사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다.
복잡하게 변화된 세계는 좌파 대 우파, 또는 진보 대 보수라는 틀로 확연히 갈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과거의 시각과 언어들은 아직 기세가 강하고, 심지어는 '척결'이나 '적출'의 신념과 행동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논점을 프레임에 가두려는 현대적 기술을 흉내 내려는 것으로도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그 본질은 전근대적인 척사론(斥邪論)이다.
근대로의 길목에서 조선의 척사파들은 "중국과 조선은 인류(人類)이나 서양은 금수(禽獸)"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척사론은 21세기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짐승의 자리에 또 다시 '빨갱이'를 올려놓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모두 망쳤다는 것도 척사론의 전통을 잇는 또 다른 형태의 주장이다.
강동국 교수에 의하면, 국민이나 그에 기반을 둔 국가는 조선말과 대한제국 시절에 서양으로부터 일본과 중국을 거쳐 유입된 개념이다. 그러나 서양에서와 달리 국가나 그 주권자로서의 국민 개념은 순조롭게 정착되지 못했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에 의해 유린되었고,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주의에 침탈되었다. 한반도에서 국민과 국가는 철저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해방 이후 국가는 회복되었지만 그것은 매우 불완전한 존재였다. 남북한 모두에서 국가장치는 심각한 폭력과 자원 배분을 왜곡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결국 북한은 '실패한 국가'로 귀결되었고, 남한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성공한 국가'와 그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등장하고 있다.
국가는 현실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절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남북한 양쪽에서 국가의 정통성을 절대시하려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부국강병 일변도로 질주하다가 자멸하고 말았던 일본제국주의의 무모함을 답습하는 경향이 있다. 복지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하려는 경우도, 국민이 허약하고 국가가 불완전할 경우 국가사회주의가 실패했던 길을 따라갈 위험을 안고 있다.
민족 개념이 한반도에 유입된 것은 20세기 벽두이지만, 국가나 국민 개념에 비하면 성공적으로 수용되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그 국민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규정되자, 국가와 국민 개념은 한반도 주민에게 저항의 대상이 되었다. 대신 민족 개념은 일본제국에 저항하는 언어가 되어 결국은 승리자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민족 개념이 통일을 지향하는 언어로 정착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남북한 양측에서 민족 개념은 분단을 유지하고 국가를 강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민족 개념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민족 개념이 남북간 연합에 기능 한다면, 남북한 각각의 개혁과 개방에는 새로운 개념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에 대한 한국형 '개념' 필요
필자는 남북한의 혁신과 통합은 지역을 재구성하고 경제조직을 다양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국민국가, 민족, 계급과 같은 기존의 개념을 반성하고 보완하는 한국형 사회과학 개념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서생이면서 상인이고자 했던 김대중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고, 새로운 세계를 위한 대안도 마련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위해 일생 분투한 대정치가의 명복을 빈다.
이일영 한신대 사회과학대 교수
(한국일보. 2009.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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