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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식] 이 수상한 시절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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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5-10 09:54 조회21,4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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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다. 노천명(盧天命) 시인의 노래처럼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그 “감미로운 첫여름”을 누리고 싶건만, 하늘은 여전히 길을 잃었다. 올봄은 잔인했다. 접종(接踵)하는 흉보(凶報) 중에서도 최악은 천안함이다. 북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이 사고만큼 정부의 무능을 드러낸 경우는 드물 터인데, 우울한 소식들처럼 음울한 날씨 속에 꽃들도 보람없이 피었다 속절없이 져버렸다. 산천도 슬며시 외면한다. 하기는 온 강들을 뒤집어엎는 반생명의 토목주의가 만연하면서 자연의 복수인 양 구제역이 다시 엄습한 침묵의 시대에 봄의 어여쁜 자태를 기대한 것 자체가 철부지 망상일 것이다.

 

이 수상한 시절, 한권의 책이 우리를 위로한다. 박형규(朴炯圭) 목사님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창비). 알다시피 목사님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살아있는 역사다. 이 경력 때문에 혹 광야에서 누더기를 입고 홀연 나타나 당대의 권력과 그에 굴종하는 민(民)을 질타한 구약 예언자들의 풍모를 예상한 독자들은 아마도 가벼운 실망을 맛볼지도 모른다. 그처럼 여러 번 그리고 지속적으로 옥고를 치르셨음에도 목사님은 형형한 투사가 아니다. 말씀도 조용조용하시다. 사자후(獅子吼)하는 분이 아니다. 그럴 수 없이 겸허하다. 무엇보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라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을 새기는지라 생활하는 대중을 때없이 꾸짖지 아니한다. 그 질그릇 대중이야말로 하나님의 교회가 자리할 보배의 성소(聖所)로 되는 목사님의 신학은 성속(聖俗)의 이분법을 해체한다. 아니, ‘해체’라는 말도 남사스러울 정도로 ‘성’이 ‘속’이요 ‘속’이 ‘성’인 지극한 경지다. 그만큼 자유롭다.

 

도대체 그 거침없는 개방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서광선 교수는 노래솜씨와 한국춤 솜씨로 함께한 사람들 모두를 즐겁게 해주는 목사님을 “광대”(121면)라고 경탄했다. 사실 나도 목사님의 춤 추는 모습을 뵌 적이 있다. 아마도 80년대 중반인가, 여러 분이 인천(仁川)의 무슨 모임에 왔다가 무슨 바람이 불어 무도장을 갔다. 그런데 목사님이 덩싱덩실 조선춤을 추시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서 양춤 추던 남녀들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목사님에 환호하는 광경도 놀랍지만, 무애(無碍)의 자유에서 거니는 목사님의 모습이야말로 최고의 경건성으로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된 터다. 회고록에 그 내력이 나온다. 일본에서 중학교 다니던 때, 한성준(韓成俊)의 승무공연을 보시고 조선춤에 빠져 동래(東萊) 권번에 가서 정식으로 우리 춤을 배우셨다는 거다.(132~33면) 한성준(1874~1942)은 판소리 최고의 고수(鼓手)로, 전통춤을 새로이 다듬은 춤의 명인으로 일세를 울린 분이다. 목사님의 춤에 한성준의 혼이 함께하다니! 어두운 시대의 일각에서 화톳불처럼 내 마음을 밝힌 그때의 광경을 새삼 다시 떠올리면서, 나는 그 자유함이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함께 살아있음의 눈부신 기쁨’을 발견하는 생명의 신학에서 비롯됨을 새삼 깨치던 것이다.

 

나는 교인이 아니지만 이런 목사님을 한국사회가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다. 누구보다 정치적이었지만 목사님은 끝내 비정치적이었다. 목사님의 정치는 어디까지나 생명의 신학이라는 깊은 종교적 부름에 입각한 것이었기에, 운동이든 현실정치든 그런 세속정치를 시종일관 제압할 수 있었다. 독재에 저항할 때나, 정치적 유혹을 뿌리칠 때나, 두 김씨의 분열에 반대할 때나, 목사님의 정치는 종교성의 순결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진정 목사님은 “하나님의 발길에 차인 사람”이시다. “나는 함석헌 선생이 즐겨 쓰신 ‘하나님의 발길에 차인 사람’이란 말도 좋아한다. 민주화운동의 길을 걷게 된 것도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서 그리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많았다. 발길에 차여서, 떠밀려서 안할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하나님만이 나를 떠민 것이 아니었다. 함께 일한 동료들, 후배들에게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렇게 나를 떠민 그들이 옳았고, 그래서 그들에게 감사했다.”(466면)

 

이런 인품이었기에 목사님의 운동은 강력한 통합력을 발휘했다. 민주화운동 속에서 신교와 구교가, 기독교와 불교가, 종교와 비종교가, 그리고 한국과 한국 바깥까지도 회통(會通)하게 하는 마력은 차라리 기적이다. 특히 일본기독교와의 연대는 감동적이다. 부패한 ‘대동아’ 대신 살아있는 동아시아가 이미 오롯하다. 생활과 운동과 신앙이 고통 속에서 하나로 되어 한국사회를 갱신해 가는 신명의 복음으로 변신하는 파노라마가 장관인데, 운동이 운동 이후의 타락을 반성하게 것이야말로 종요롭다. 출판기념회에서 백낙청(白樂晴) 선생이 지적했듯이, 목사님의 회고록은 진정 우리 민주화운동의 대서사시다. 우리 시대의 집합적 공동전기를 단정한 문체로 정리한 신홍범(愼洪範) 선생의 노고로 완성된 이 책을 덮을 즈음에는 어느 덧, 위로는 강력한 희망으로 변신한다. 기억을 복된 소식으로 제련하는 서사시의 힘을 실감케 하는 영원한 찰나다.

 

최원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장)

(서남통신. 2010.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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