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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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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5-24 10:50 조회21,4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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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당신이 뒤뜰에 심으신 홍매가 붉게 피었다 졌습니다. 장독대 옆의 매화가 하얗게 피어서 은은한 향을 마당 가득 펼쳐 놓고 있는 걸 당신도 보셨는지요.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왔지만 봉하마을 당신이 사시던 집 마당에는 봄이 때 맞춰 찾아와 산수유꽃 개나리꽃을 노랗게 피우더니 논둑에는 쑥들이 보얗게 돋아났습니다.

양지쪽에 돋은 쑥을 뜯어다 당신의 아내는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셨습니다. 짙은 쑥 향이 방안 가득 넘치는 걸 당신도 느끼셨는지요. 몰래 한 숟갈 떠 드셨는지요.

지난 해 가을 거둔 봉하쌀로 지은 밥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데 그 따뜻한 밥도 한 술 드셨는지요. 봉하쌀로 쌀막걸리를 빚은 건 알고 계시는지요. 그 막걸리 맛이 너무 좋아 입에 착착 달라붙습니다. 막걸리 한 사발 하시면 "캬, 좋다!" 소리가 저절로 나올 텐데 같이 한 잔 하지 않으시렵니까.

산과 하늘과 바위가 잘 올려다보이도록 바깥쪽으로 조금씩 높아지게 지은 당신의 집 식탁에 앉아 올려다보는 부엉이 바위 쪽 산 풍경은 네 폭의 병풍에 담은 산수화입니다. 당신도 그곳에서 이 집을 내려다보고 계십니까. 아내 혼자 지키고 있는 집이 보이십니까. 아내 혼자 창가를 서성이고 있는 게 보이십니까. 혼자 남겨진 당신의 아내를 생각하면 당신이 야속할 때가 있습니다.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다니던 당신의 손녀딸을 생각하면 당신이, 당신의 고집, 당신의 원칙, 당신의 자존심이 미울 때가 있습니다. 또다시 봄이 와 과수원 사과꽃 하얗게 피는 게 싫은 날이 있습니다.

오늘도 당신을 잊을 수 없는 수 천 수 만의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 봉하마을로 오고 있습니다. 저 사람의 물결이 보이십니까? 그들의 발소리가 들리십니까. 왜 끝없이 사람들이 밀려오는 걸까요. 치열하게 살았으나 욕되게 살 수는 없어 벼랑 끝에 한 생애를 던진 당신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당신을 이대로 보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당신을 보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봉하마을에 남아 일하고 있는 게 보이십니까. 오늘도 밀짚모자를 쓰고 오리농사 지을 준비를 하고 오늘도 정미소의 기계를 돌리며 목장갑 낀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는 게 보이십니까. 밤늦도록 당신의 이름 주위로 몰려오는 사람에게 보낼 우편물을 정리하고 있는 이들이 보이십니까.

당신과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아직도 박해와 탄압을 받고 있고, 모함에 시달리거나 수모를 당하며 여기저기 끌려 다니느라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웠던 세상은 지진이 휩쓸고 간 땅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고 우리는 폐허의 가장자리에 서 있습니다.

거기 서서 다시 무너진 사원을 세우고 종소리를 울려 살아남은 사람과 나무와 어린 새를 돌아오게 하고 있습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은 그만 하자고 했습니다. 당신이 그립고 당신이 보고 싶고 당신과 함께 일하고 싶지만 입술을 사려 물고 남아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지키려 했던 가치, 당신이 이루려 했던 꿈을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아직 거기까지 가지 못했으므로 아니 그동안 이루었던 것이 다 무너지고 있으므로 다시 손을 잡고 신발끈을 단단하게 묶기로 했습니다.

벽에 살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담쟁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을 끝내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는 담쟁이처럼 우리 앞에 놓인 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멈추지 않기로 했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벽을 넘기로 했습니다.

당신은 지난 해 봄 사저에 걸려 있던 '담쟁이'란 제 시를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지금은 소나무 그림이 결려 있습니다. 당신의 아내는 거기에 다시 '담쟁이'를 걸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를 찾아 걸겠다는 것은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벽에서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벽을 벽으로 받아들이지만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절망으로 인해 주눅 들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벽과 맞서겠다는 것입니다. 여럿이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이 어려운 상황을 넘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설령 물 한 방울 없고 흙 한 톨 없는 벽에 살게 되었다 할지라도 멈추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담쟁이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수많은 이파리들과 손에 손을 잡고 한 발짝씩 나아가듯 그렇게 자신을 믿고 힘을 합해 우리 앞에 놓인 장벽을 넘겠다는 것입니다.

원칙을 버리지 않고 승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정의롭게 살아도 이길 수 있다는 걸 다시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당신도 우리가 그렇게 깨어 있는 시민으로 살아 움직이는 걸 보고 싶어 하실 겁니다. 깨어 있는 이들의 조직된 힘만이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당신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아닌지 지켜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또다시 오월이 왔습니다. 당신이 떠나신 오월입니다. 당신을 향한 갈망과 공허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여기 이렇게 그리움과 추억을 안고 왔습니다.

이승에서의 인연은 이렇게 아프게, 이렇게 황망하게 끝났지만 삼천대천세계를 넘어 우리의 인연은 다함없이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그곳에서도 부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도종환 시인

201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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