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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서] 오끼나와, 연동하는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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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6-14 16:29 조회20,1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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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말 동아시아의 미래와 직결된 두 개의 회의가 열렸다.

 

5월 30일. 제주도에서 한중일 정상이 만나 ‘비전 2020’을 채택했다. 상설사무국을 한국에 두고 동북아 3개국의 경제협력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가 실질적으로 이행되면서 기존의 아세안+3의 운영과 연동해갈 때 동아시아공동체의 전망이 좀더 밝아질 것이란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한중일 세 나라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들이 점점 많아지는 오늘날 정부간 대화채널이 활성화되는 것은 동아시아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 그런데 비전 2020의 핵심내용인 경제적 교역 확대와 이를 위한 각종 무역장벽의 철폐만 해도 각 나라의 여러 산업부문과 계층의 구성원들에게 고르게 실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지역협력체를 제도화가는 과정에 시민사회의 참여가 끽긴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전날인 5월 29일. 오끼나와대학에서는 ‘아시아 속에서 오끼나와 현대사를 다시 묻는다’는 주제의 국제회의가 열렸다. 현지의 대표적인 비판지성 아라자끼 모리테루(新崎盛暉, 74세 오끼나와대학 명예교수)의 오끼나와 현대사에 관한 저서가 중국어와 한국어로 각각 번역된 것을 기념하는 회의였다. 그 하루 전 28일에는 미일 두 정부가 오끼나와의 후뗀마(普天間) 미군기지를 오끼나와현 안으로 이전하겠다고 공동발표한 데 항의하는 오끼나와 주민 4천여명의 집회와 시가행진이 있었다.

 

그 전날 시위의 열기가 그대로 이어진 29일의 회의는 한국․중국․ 타이완․일본 본토의 참석자와 오끼나와 주민들이 함께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생에 대해 자발적으로 논의한 그야말로 연대와 소통의 이름에 값하는 자리였다.

 

필자는 이 회의에 참석하여 오끼나와 주민들이 느끼는 한과 그것이 지닌 동아시아적 의미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오끼나와인의 한은 역사적으로 오랜 뿌리가 있다. 그것은 회의의 한 참석자가 이번 일본과 미국 정부의 합의를 ‘제4의 류큐처분’이라고 꼬집은 데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본디 일본과 중국 모두에게 조공을 바치는 이중관계를 맺으면서 독립을 유지한 류큐왕국이 지배하던 오끼나와가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복속당해 하나의 현으로 재편된 것은 1879년이다. 그것이 이른바 제1의 류큐처분. 제2의 류큐처분은 명목상으로는 일본 영토이나 사실상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어 미국 법이 시행되는 미군 통치가 1952년(실제 지배는 1945년)부터 본격화된 것을 가리킨다. 제3의 류큐처분은 1972년 오끼나와가 본토로 복귀된 것을 말한다. ‘처분’이란 용어의 사전적 풀이가 “구체적인 사실이나 행위에 대한 행정권 또는 사법권의 작용의 발동”이란 점에서 드러나듯이, 오끼나와 주민의 운명을 결정지은 세 차례의 사태가 모두 위로부터 권력기구의 일방적인 주도로 이뤄졌다고 해석된다. 이번 조치를 ‘제4의 류큐처분’이란 부르는 것은 바로 이같은 역사적 맥락의 연속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일본 영토의 0.6%인 오끼나와에 주일미군기지 75%가 들어서 있다. 대부분 사유지나 지자체 소유지를 징발한 것이다. 미군기지가 이렇게 많다보니 오키나와 주민들과 미군 사이의 갈등이 심하고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이 저지르는 각종 사고 때문에 신체적정신적 위협을 느낄 정도다. 예를 들어 2004년 8월 오끼나와의 국제대학 교내에 미군 헬리콥터가 추락한 사건이 상징적이다. 바로 이 점을 짚어낸 민주당 정부가 후뗀마 기지를 오끼나와 현 밖으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리고 작년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 올해 5월 말까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이 좌절되고 급기야 하또야마 총리가 물러나고 만 것은 잘 알려진 그대로이다.

 

사실 일본 본토의 국민은 오끼나와인들의 희생 위에 그간 민주주의와 번영을 구가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시민운동을 하다가 정계에 진출해 ‘시민파’ 총리라 불리는 간 나오또(菅直人) 내각을 비롯한 일본인이 청산해야 할 그들만의 빚인가.

 

필자는 그것이 다른 동아시아인도 일정 부분 함께 져야 할 빚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동아시아는 서로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또야마 전 총리가 종래의 공약을 번복하면서 내건 명분이 미군기지가 ‘억지력’ 유지에 필요하다는 것이었음을 생각해보자. 그 억지력의 대상이 북한이고 중국인 것이다. 천안함사건이 발생하자 후뗀마 기지 문제로 곤경에 처했던 하또야마 전 총리는 곧바로 북한 위협론을 내세우며 그 억지를 위해 오끼나와 현내로 이전할 수밖에 없다는 핑계를 댔다. 하또야마 전 총리가 억지력 개념을 구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오까모또 유끼오(岡本行夫)는 일미안보의 억지력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하며, 특히 해양권익을 추구하는 중국해군의 팽창을 ‘으스스하다’고까지 표현한다. 미일안보의 약체화라는 형태로 ‘힘의 공백’이 생기면 이제까지의 패턴대로라면 중국은 센가꾸(尖閣)를 점거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하지만 억지력이란 발상이 공허한 것임을 지적하는 소리도 높다. 한미동맹이 ‘양자․지역․ 범세계적 범주의 포괄적인 전략동맹’으로 전환하였듯이, 오끼나와의 주일미군도 이미 동아시아의 억지력으로만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과 한국의 미군기지는 이미 동아시아의 안전을 위해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라시아대륙 전체를 목적으로 한 기지로서 미국의 세계전략 속에 위치지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을 제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끼나와를 통해 연동하는 동아시아를 깊이 들여다보며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2000년 남북한의 정상이 합의한 6·15선언의 기조에 따라 남북화해를 심화시켰더라면 지금의 상황에서 오끼나와인의 고통 해결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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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끼마 미술관에 전시된 <오끼나와 전투>

 

이것이 후뗀마 기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미술관에 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떠올리게 하는 ‘오끼나와전투’란 대형 그림(400☓850cm)----1945년 패전 직전의 지상전에서 희생당한 인물들의 눈동자 없는 처참한 모습을 검은색과 붉은색을 대조시켜 선명하고도 섬세하게 묘사한 수묵화와 유화가 융합된 작품--에 압도당한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던 회한이자 다짐이다.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

(서남포럼. 2010.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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