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누굴 믿고 군대를 보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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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3-31 07:18 조회21,3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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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이 저 추운 바다에서 떨고 있어요. 제발 내 아들을 살려주세요.” 차디찬 물속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외동아들을 껴안듯 아들의 사진을 감싸안은 채 홍수향씨는 이렇게 절규했지만, 아직도 천안함 실종자들에 대한 구조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생존 가능 시간이라고 알려진 69시간이 이미 훌쩍 지나버린 지금 홍씨를 비롯한 실종자 가족들의 가슴이 얼마나 타들어가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제 기적밖에 기대할 게 없는 상황에 몰린 가족들은 군과 정부의 대응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사태에 대한 군과 정부의 대응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투성이입니다. 구조 과정, 사건 규명, 실종자 가족에 대한 대응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사건 발생 직후부터 네차례나 국가안보회의를 여는 등 긴박하게 대응했지만 부실한 설명으로 오히려 혼란만 초래했습니다. 정부 당국은 천안함이 평소와 달리 수심이 얕은 육지 가까이까지 간 이유처럼 확인 가능한 사안에 대해서조차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오락가락 설명에, 뭔가를 숨기려는 듯한 태도까지 보이니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해군을 비롯한 군부의 태도는 또 어떻습니까? 해군은 사건 발생 직후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지만, 단 한사람도 구조하지 못하고 조명만 비춰준 게 고작이었습니다. 떨어져나간 함미를 찾아낸 것도 민간 어선이었지 해군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은 “군의 초동작전은 비교적 완벽하게 이뤄졌다”고 자찬합니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완벽한 작전’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천안함에 물이 새는 등 정비상태에 문제가 있었을 뿐 아니라 평소에 재수가 없다고 해서 이함훈련을 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는 점입니다. 이런 증언이 사실이라면 우리 군은 병사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긴 무책임한 집단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무력하고 무책임한 군을 보고 어떻게 사랑하는 아들을 군대에 보낼 수 있으며, 국민들이 믿고 발을 뻗고 잘 수 있겠습니까?
실종자 가족들에 대한 군의 대응에 이르면 놀라 입이 벌어질 지경입니다. 사건 발생 이후 46명의 실종자 명단이 언론에 보도될 때까지 가족 가운데 어느 누구도 군으로부터 그들의 실종 사실을 통고받지 못했습니다. 방송을 보고 군부대로 찾아간 그들은 몇시간 동안 아무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방치됐습니다. 사건 발생 18시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설명회 자리가 만들어졌지만 군은 기어이 언론을 배제하려 했습니다. 가족들이 이에 반대해 실랑이가 벌어지자 일부 군인들은 가족들에게 총을 겨눴습니다. 설명에 나섰던 천안함 함장은 부실한 설명에 항의하는 가족들을 차에 매단 채 달려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이게 사랑하는 아들·남편·형제·연인의 생사조차 알 수 없어 슬픔이 목에 찬 이들을 위로하는 방식입니까? 위기 때야말로 그 조직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천안함 사태는 단순히 우리 정부와 군의 위기대응 능력의 한계만 드러낸 것이 아닙니다. 이 정권과 군의 국민관도 여지없이 폭로됐습니다. 그들에게는 국민 생명이나 고통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관심은 정권과 군의 안위뿐입니다. 그런 그들이 이번 사태로 실종 장병의 가족뿐 아니라 그 가족들을 지켜보는 온 국민의 가슴에도 피멍이 맺혔음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국민들로선 그 가족들의 처지가 나의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거둘 수 없는 탓입니다.
권태선 논설위원
(한겨레. 2010.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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