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누가 학생인권조례를 두려워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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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7-19 16:03 조회20,4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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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한국과 일본의 교육을 비교연구하는 일본 교육학자 한 분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교육인적자원부’란 당시 우리나라 교육 담당 부서 명칭에 한국 교육 문제의 근원이 있다고 한 그의 지적이었습니다. 교육 대상인 학생을 인간이 아닌 도구로 여긴다는 뜻이 아니냐는 거였습니다. 우리 교육 문제의 핵심을 꼭 집어낸 그의 비판을 들은 뒤 십수년이 지나고 교육인적자원부란 명칭도 바뀌었지만, 학생에 대한 우리 교육의 관점은 변한 게 없습니다. 아니 경쟁을 강조하는 현 정권 아래서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경기도와 서울 등 일부 시·도의 학생인권조례 추진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두발규제나 체벌 철폐를 넘어 학생을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 존중하려는 인간회복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경기도에서 마련한 조례안도 학생 인권을 학교 교육과정에서 실현되도록 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수구세력들은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학생인권 보장은 교권에 대한 위협이고, 미숙한 아이들에게 교육정책에 대한 참여권과 집회의 자유까지 주면 특정 정치세력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학생 지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사들이 학생인권만 강조하면 어려움이 가중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과거보다 자기주장이 강해 다루기 힘든 게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교육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학생인권과 교권은 결코 대립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학교는 아이들을 가둬놓고, 오로지 학력경쟁에 몰두하도록 채찍질하는 곳입니다. 19세기 공장법에서도 금지한 아동에 대한 야간노동이 자율학습이란 명목으로 강요됩니다. 학교는 감옥, 아이들은 죄수, 교사는 간수라는 자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한참 자유분방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을 이렇게 억눌러놓고 아무런 반항도 없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차별과 폭력에서 자유롭고, 개성을 실현할 수 있으며, 학습·휴식권과 자신들과 관련되는 교육정책에 대한 참여권이 보장되는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의 숨통을 틔워주는 일은 교사가 간수가 아닌 교육자로 돌아오는 길이기도 합니다. 학생인권이 교권의 교두보가 되는 것이지요.
조례에 대한 수구세력의 진짜 우려는 ‘촛불 홍위병’이란 말 속에 함축돼 있습니다. 선동과 유언비어에 휩쓸리기 쉬운 미성숙한 10대에게 집회의 자유와 교육정책 참여권을 주면 학생은 정치꾼, 학교는 난장판이 될 것이란 주장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민도가 낮은 중국이 민주주의로 가려면 군사독재(군정)와 일당독재(훈정)를 거쳐 민주적 헌정단계로 가야 한다고 한 쑨원의 주장에 기대 일당독재를 합리화한 장제스에 대한 후스의 비판이 떠오릅니다. 그는 <우리의 정치주장>이란 글에서 민주제도란 그 자체가 갖고 있는 훈련·교육 기능에 의지해 발전해 나갈 수 있다며 민주제도 시행이 바로 민주주의 훈련과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치려면 우선 물에 집어넣고 물장구라도 치게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이고, 교육은 민주국가에 걸맞은 민주시민을 육성할 책무를 집니다. 아이들을 유언비어나 선동에 휩쓸리지 않는 성숙한 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해서도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성숙할 기회’를 부여해야 합니다. 인권조례는 학생을 인간대접해 스스로 성숙할 기회를 갖게 하자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더군다나 아동(학생)인권조례는 이웃 일본에서도 이미 13개 지방자치단체에서 도입한 것입니다. 민주시민을 기르는 학생인권조례가 두렵다면 반대만 할 게 아니라 스스로 반민주 세력이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권태선 논설위원
(한겨레. 2010.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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