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욱] '족보 없는' 한나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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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12-18 12:17 조회22,1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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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의 역할에 만족하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라면, 정당은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그 뜻에 동조하는 시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정권을 잡거나 재창출하는 것을 1차 목표로 한다. 대통령제의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권은 물론 의회권력까지 장악해야 정당이 바라는 바를 안정적으로 추진해 나갈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정당들은 언제나 국민 과반의 지지 확보를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다.
6·2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한나라당이 자신을 미래지향적인 개혁적 중도보수 정당으로 환골탈태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 ‘정당다운’ 태도였다. 분배와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민심의 진보화를 잘 읽은 것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기막힌 일이 12월 예산국회에서 벌어졌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복지예산은 무시 혹은 경시되고 그 대신 이른바 ‘형님 예산’ ‘실세 예산’ ‘마누라 예산’ 등으로 구성된 사심 가득한 새해 예산안을 4대강 관련 법안과 함께 한나라당이 날치기 처리한 것이다. 게다가 아랍에미리트연합 파병안이나 서울대 법인화안 등과 같이 중차대하기 그지없는 입법안들이 최소한의 논의조차 생략된 채 그 날치기 예산안에 부록처럼 끼워져 통과됐다. 그 와중에 목격된 김성회 의원의 폭력과 박희태 국회의장의 무능은 한나라당의 궁색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과거회귀적인 수구적 강경보수 정당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정책기조 없이 대통령 사당 전락
민심은 매우 흉흉해졌다. 국민의 대다수가 크게 분노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2012년의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국민 과반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불과 몇 달 사이에 한나라당은 어찌도 그리 정권 재창출에 무심한 듯한 ‘정당답지 않은’ 기득권 남용 세력으로 돌변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많은 이들이 청와대를 주목하고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청와대 변수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청와대가 아닌 한나라당 자신에서 찾아야 한다. 만약 한나라당이 확실한 정책기조와 이념으로 승부하는 이른바 제도적 지속성을 갖춘 ‘족보 있는’ 집권 정당이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정당은 적어도 이념 및 정책기조에 관한 한 대통령에게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대통령을 구속한다. 즉 대통령이 자당이 추구하는 노선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할 경우 집권당은 최선을 다해 그것을 방지하고 견제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단임으로 끝날지라도 정당은 무한히 계속되는 선거정치에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한나라당은 (과거보다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인물과 지역 변수에 의해 그 명맥이 유지되는 전근대적 정당이다. 그러니 그 두 변수에 대한 관리 능력을 거의 독과점하고 있는 대통령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란 애당초 어려운 일인 것이다.
사실 이것은 한나라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집권당들도 모두 물론 이번과 같이 무도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당부분에 걸쳐 대통령의 사당 역할을 수행했다. 결국 문제의 해법은 정당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체제가 인물이나 지역이 아닌 이념과 정책 정당들로 형성되도록 해야 의회민주주의가 올곧게 발전해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선거제도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현행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는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와 인물주의를 조장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지역·인물 탈피한 선거개혁 필요
비례대표제의 획기적 확대가 필요하다. 그래야 인물이 아닌 정당을 보고 하는 투표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선거정치가 정책과 이념 중심의 정당 간 경쟁으로 전환되며, 족보 있는 당당한 정당들이 부상할 수 있다. 더구나 그 경우엔 셋 이상의 유력 정당이 의석을 비교적 고르게 나눠 갖게 마련이므로 한 정당이 홀로 국회의 다수당이 될 가능성도 낮아진다. 단독 다수당이 아닌 한 어느 정당도 법안의 날치기 통과 시도는 감히 자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제발 선거제도 개혁에 힘을 모으자.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경향신문. 2010.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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