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 승자에 대한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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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2-29 14:05 조회21,91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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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는 정상에서 벗어난 현상들이 꽤 있다. 합리성의 세계를 가정하고 있는 경제학에서도 눈앞에서 자주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발견한 개념이 '승자에의 저주'(winner's curse)이다.
게임에 이긴다 해도 이득은 없어
케이펜 등은 석유회사들이 시추권을 얻으려고 경매에서 다투는 상황을 통해 '승자에의 저주'라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 경매에서의 승자는 실제로 패배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경매에서 너무 가격을 높이 부르는 바람에 손실을 입거나 손실을 입지 않더라도 실제 이윤이 예상보다 낮아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공세적으로 입찰가격을 제시해서 이긴다는 것은 물건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경매에서의 승자는 "저주를 받게 된다."
게임의 참가자들이 모두 합리적이라면 '승자에의 저주'는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시장거래 밖의 영역으로 가면 이상 현상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집권세력이 정교한 계획 없이 세종시 원안을 수정하겠다고 나선 것을 합리적 계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도 정치적 계산으로는 불리하지만 역사적 책임 때문에 원안대로 갈 수 없다고 발언한 바 있다. 정치공학적 계산법을 새로이 덧붙이는 이들도 있다. 강경파 중에서는 "충청권을 버리더라도 수도권을 얻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전적 계산이 아니라 사후적 합리화일 가능성이 높다. 수도권에서의 반사이익은 어디까지나 예측에 기초한 예상이익일 뿐이다.
국회에서의 격렬한 대치도 이상한 현상 중의 하나이다. 예산안과 관련한 최대의 쟁점은 4대강 사업이다. 민주당 등 야권이 백기를 들고 양보하는 상황이나 이명박 대통령이 입장을 전면 선회하는 상황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보의 수를 줄이고 준설량을 조정하는 다양한 타협안을 가지고 협상하는 것이 균형점을 찾아가는 모색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여당은 야당에게 '대통령 사업'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말라는 입장이라고 한다.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치적으로도 4대강 사업의 실제 이익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검찰의 질주에 관해서도 그 속내에 대해 화제가 무성하다. 정직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한명숙 전 총리가 공관의 공식 행사 뒤에 5만 달러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쌍방 주장의 진실 여부가 화제가 되고 있지만, 경제학자에게는 게임 참가자의 '계산'에 더 관심이 간다.
일각에서는 검찰의 정치적 의도에 주목한다. 검찰의 목표가 지난 정부 및 야당 인사를 겨눈 것이라는 것이다.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에서 피의사실 유포 등으로 비난을 샀었는데, 이번에도 피의사실이 흘러나왔다. 주의할 법 한데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정교한 계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무의식적 습관이 아닌가 싶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회지도층 비리 엄단과 토착 비리 근절 지시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세종시, 4대강 사업, 지방선거 등 정권의 명운을 건 프로젝트를 앞두고 공무원과 여권을 단속하려 한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 일들이 정교한 기계장치가 합리적으로 작동한 결과라 하기보다는 승자의 비정상적 공세 행위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한 것 같다.
무슨 일이든 '교만의 관성'이 문제
실증 연구의 증거들에 따르면 '승자에의 저주'는 매우 광범한 현상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왜 이런 이상한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의 하나가 교만가설(hubris hypothesis)이다. 승자들은 자기과신에 빠져 물건의 예상가치가 시장가치를 초과하기만 하면 무조건적으로 행동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승자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측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의 연구결과들은 이러한 믿음이 근거 없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일영 한신대 사회과학대 교수
(한국일보. 2009.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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