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욱연] 동아시아의 상호 멸시 속에 드러나는 자기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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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5-12 10:10 조회21,3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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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인 곽말약(郭沫若)이 일본에서 유학할 때 일이다. 규슈제국대학 의과대학에 합격하여 들뜬 마음으로 규슈에 온 첫날, 여관에 들었다. 주인이 처음에는 제국대학 학생인 그에게 좋은 방을 주더니 조금 있자 그 방은 방금 예약이 되었다면서 구석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곽말약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주인이 차별을 한 것이다. 곽말약은 이날의 경험을 한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치욕’이라고 불렀다. 심사가 뒤틀린 곽말약은 숙박계를 쓰면서 “일부러 비굴하게 굴”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 시나징(支那人)이라 이름이 어렵습니다. 제가 직접 쓰지요.”
‘시나징’이라는 말은 ‘죠센징’처럼 당시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을 비하할 때 부르던 호칭이었고 중국인들은 이를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 ‘시나징’이라는 호칭은 김동인의 소설 「감자」에도 나온다. “왕서방의 집에는 지나인들이 모여서 별한 악기를 뜯으며 별한 곡조로 노래하며 야단하였다.” 왕서방이 돈으로 새 색시를 사오고 이에 분개한 복녀가 “눈에 살기를 띠고 방 안의 동정을 듣”고 있던 대목이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한국이 중국과 단절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동아시아의 지각은 뒤흔들렸고, 그 이후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 역시 중국인들을 멸시하기 시작하였다. 그 멸시의 감정은 일본과 한국이 미국의 우산 아래 들고 마오쩌뚱 시대에 중국이 극단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가면서 더욱 깊어졌다.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중국을 멸시하는 것은 주로 제국주의 시대와 냉전 시대의 산물이지만, 좀더 길게 보자면 깊은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중국을 동아시아 문화의 종주국으로 오랫동안 섬겨왔던 과거 역사에 대한 보상 심리의 일환으로, 상처 난 자존심의 회복과정의 하나로서 근현대 중국을 멸시하여 온 것이다. 중국에 대한 해묵은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의 전도된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중화의 조공 체제 안에 있었던 한국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중국을 멸시하는 한국인의 의식과 과잉 우월의식에는 역설적이게도 민족적 트라우마(trauma)와 상처 난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우리의 우울한 민족적 초상이 안쓰럽게 서려 있다.
그런데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을 대놓고 멸시하는 것에 중국인들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일본에서 치욕을 체험한 곽말약은 훗날 「행로난(行路難)」이라는 자전 소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일본인아, 일본인아, 배은망덕한 일본인아, 우리 중국이 대관절 어디가 너희만 못하기에 너희들이 이렇게 우리를 멸시하느냐.” 곽말약은 중국은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은혜를 베푼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고, 중국은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결코 일본에 뒤지지 않는데도 배은망덕한 일본이 중국인을 무시하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 곽말약이 이런 치욕과 굴욕의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에 복수하겠다는 복수의 의지를 다지는 것은 일본인들에게 당한 차별과 무시가 주요 계기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곽말약이 왜곡된 대국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곡된 대국의식과 기형적인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 중국의 문화종속국이었던 하찮은 일본에게 무시당했다는 모멸감이 더욱 증폭된 것이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곽말약이 그러했듯이, 한국과 일본의 문화는 모두 중국이 전수해 준 것이고 일본과 한국은 중국 문화의 속국이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 두 나라가 돈은 좀 있는지 모르지만 문화적으로 족보 없는 민족이라고 생각하면서 기형적인 우월감과 대국의식에 젖은 중국인들이 지금도 많다. 중국이 부상하면서 이런 눈으로 한국과 일본을 대하는 중국인들이 더욱 늘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중국인은 더럽고 거짓말 잘 하고, 돈만 밝히는 사람들이라고 여기면서 중국인들을 멸시하고 중국에 분노하는 한국과 일본인들 역시 지금도 넘쳐난다.
중국이 일본과 한국을 무시하고 한국과 일본이 중국을 무시하는 이러한 동아시아의 역사적 유산은 지금도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부비트랩이 되고 있다. 이 부비트랩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곽말약의 경우에서 보듯이 중국인들의 치욕감은 기형적인 대국의식과 동전의 양면이고, 일본인 여관집 주인과 김동인의 소설 「감자」의 경우처럼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중국을 멸시하는 것은 과거 피해의식이 전도된 경우이다. 이러한 의식은 상대를 향하는 것이면서도 결국은 자신을 향하고,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의식이다. 동아시아인들 사이의 이러한 과잉의 상대 비하와 과잉의 자기 우월감은 상대방을 지향하지만, 결국 자신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일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할 때, 중국인들이 한국인과 일본인들을 존중하고,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중국을 존중하는 것은 상대국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대주의적 발상이나 한간(漢奸:중국인들이 말하는 매국노)이 되는 일이 아니라 한중일이 피해자로서 혹은 가해자로서 입은 자신의 과거 상처를 치유하는 일, 자신의 정상적 자아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동아시아를 하나의 단위로 사고하고 동아시아 의식과 동아시아 감각을 회복하는 의식적 노력, 그리고 각자가 한중일 국민을 넘어 동아시아 시민으로 귀환하는 훈련이, 동아시아인 개인들의 의식과 일상 차원에서 절실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욱연(서강대 중국문화전공 교수)
(서남통신. 2009.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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