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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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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7-21 15:03 조회28,0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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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의 다양성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체제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주1) 그런데 한때 신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수렴론'을 유포했다. 세계화가 초래하는 국가간 무한경쟁이란 결국 각국 경제의 효율성 극대화 경주를 의미하는바, 여기서 각 나라는 (그 경주의 핵심주자인) 자본과 기업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각국의 자본주의가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수렴될 것이며 그것이 자본주의의 세계표준이 되리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수렴론대로 되지 않았다. 서유럽의 경우,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된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영국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들의 자본주의체제는 (비록 과거에 비해 시장의 비중이 어느 정도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이 여전히 국가 및 사회적 영향력 하에 놓인 상태에서 각기 제 나름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은 건재했다는 것이다.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유지되는 이유를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는 변수는 각국별로 상이한 '생산레짐'(production regimes)이다. 생산레짐이란 기업의 생산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상호 보강의 관계에 놓인 제도들의 조합"을 말한다.(주2) 그 제도들에는 금융체계, 기업지배구조, 기업간관계, 노사관계, 상품생산체계, 훈련 및 고용체계 등이 포함된다. 각국의 생산레짐은 이 구성제도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어떠한 국가-사회적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되는지에 따라 서로 다르다. 따라서 생산레짐으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성격은 나라마다 다른 것이 당연하다.(주3)

그런데 이 생산레짐은 쉽게 변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구성하는 각 제도들과 그들 간의 조합은 각국의 독특한 역사 및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성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화의 압력에 직면할 때 각국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생산레짐 특성에 맞추어 적절한 정책적 대응을 할 뿐이지 생산레짐 그 자체를 변화시키려 하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컨대, 노조의 강력한 힘을 보장해주는 제도를 갖춘 자본주의 국가라면 무한경쟁의 세계화시대를 맞이해서도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채택 등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노동자의 숙련 향상을 도모함으로써 생산성을 제고하려 하지, 노사관계에 획기적인 제도적 변화를 일으켜 노동시장의 유연성만을 증대시킴으로써 그에 입각한 노동비용 절감을 꾀하지는 않는다. 결국 지속성을 지닌 각 생산레짐의 개별적 특성상 세계화 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의 세계적 수렴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생산레짐론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에 따르면 1980년대와 1990년대 상황에서 세계 자본주의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이 포함된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ies, LME)'와 독일과 북유럽국가 그리고 일본 등으로 대표되는 '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ies, CME)'가 그것이다.(주4) 칼 폴라니의 이론적 틀에서 보면, CME는 시장과 국가-사회관계가 '맞물려'(embedded) 있는 상태이며, LME는 이 관계가 '풀려서'(disembedded) 시장이 자율적으로 기능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주5) 따라서 CME에서는 노사관계나 훈련 및 고용체계 등 제반 생산레짐 요소의 작동에 대하여 국가나 사회의 조정 혹은 개입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반면, LME에서는 모든 생산관련 제도의 작동이 기본적으로 기업에 의해 시장의 원리대로 이루어진다. 자본주의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CME체제에서는 대체로 (LME체제와 달리) 성장, 효율성, 경쟁만이 아니라 분배, 형평성, 연대 등의 가치가 중시되고 지켜진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바로 약자 편에 서서 시장을 조정하고 사회공동체를 유지해가는 조정 역할을 국가 또는 사회가 맡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비시장적 조정 역할이 정책적으로 극소화된 형태의 LME체제라고 볼 수 있다.

 

2. 한국에 적합한 신자유주의의 대안 마련

민주화 이후의 역대 한국 정부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LME체제 혹은 신자유주의로 가는 길을 선택하고 추진해왔다. 김영삼 정부에서부터 시작된 한국의 신자유주의화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를 거쳐 조심스럽기는 했으나 점진적으로 줄곧 강화돼왔다. 현 이명박 정부는 지난 정부의 그 조심성마저도 버린 채,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위험성과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이후 미국 스스로가 자신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수정해가는 상황에서도 '역주행'이라는 비판까지 감수해가며 노골적인 신자유주의화를 추진하고 있다. 양극화의 심화와 비정규직 증대 등 신자유주의화에 따른 사회경제적 폐해는 이미 사회통합의 위기를 우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와있다. 그렇다고 신 성장동력이 확보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 정부는 계속 신자유주의화를 강행 추진해갈 것인가? 그것을 막아야겠다면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내놓을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현재 이 문제에 매달려 신자유주의의 대안모델 마련을 위해 연구하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 있을 정도의 명쾌한 답안이 나온 것은 아니다. 매우 중요한 과제이니만큼 이 연구에는 앞으로 더 많은 인력과 시간이 투자되어 현실적 대안이 구체적으로 나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도 (자본주의의 다양성과 그 일개 유형 중의 하나인 신자유주의의 위기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한국에 합당한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 모델을 설계함에 있어 최소한의 원칙 몇 가지에 대해서는 시민사회의 합의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첫째, 위에서 소개한 양대 유형론에 따르자면 한국 자본주의의 유형은 CME체제여야 한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지구촌 전체가 신자유주의나 미국식 LME체제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때이니만큼 이에 대한 합의는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 한국형 시장경제는 무엇보다 격차문제 해결에 유능한 체제여야 한다. 상기한대로 생산레짐은 정치나 사회 제도는 물론 역사와 문화 변수 등과도 맞물려 발전하는 것이다. 한국은 공동체 지향의 역사와 문화전통이 강한 사회이다. 게다가 격차 용인 정도가 높을 수 없는 인구밀도와 산업구조를 갖고 있다. 전술한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도 격차 문제 해소는 필수이다. 또한 한국의 성장동력 약화의 주요 원인인 내수 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저소득층의 소비 진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격차 해소에 주력해야한다. 이 모든 조건들이 한국에 합당한 자본주의는 LME가 아닌 CME이며, 그것도 특히 격차문제의 관리와 조정에 뛰어난 CME여야 함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셋째, 한국의 기존 생산레짐 여건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는 시장경제 체제로 설계돼야 한다. 이것은 또한 신 성장동력의 확보 문제와도 연결된 논의이다. 생산레짐이란 쉽게 바뀌는 게 아니며, 따라서 대안 체제로의 이행은 기존의 것을 토대로 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좋다. 그렇다면 한국의 현 생산레짐을 면밀히 분석하는 작업이 급선무이다.

예컨대, 상품생산체계와 연관된 한국의 산업구조를 일별해보자.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산업구조는 금융 등의 서비스산업과 일부 첨단산업에서만 우위를 보이는 영미형보다는, 전통 제조업과 IT등의 첨단제조업 분야에서 고른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스웨덴, 핀란드, 아일랜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 북유럽의 강소국 유형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주6)

세계 시장에서 아직 국제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 상품은 일반 기술이 아니라 기업 또는 산업에 특화된 기술을 요구하는 (독일, 일본, 스웨덴 등과 같은 CME 국가들에서 생산되고 있는) 중화학 공업이나 IT 산업 제품들이라는 사실도 이를 입증한다.(주7) 말하자면 한국은 CME 상품생산체계의 전형인 고숙련 생산체계 하의 '고품질 특화 상품'(diversified quality product, DQP) 생산이 중심이 되는 경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산레짐 요소들 간의 상보관계를 고려할 때) 거기에 합당한 고용체계나 노사관계가 무엇일지는 자명하다. 기업 입장에서 볼지라도 단기보다는 장기 고용체계가 그리고 분쟁적이기보다는 협력적 노사관계가 기업 또는 산업의 특수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노동의 안정적 확보에 적합하다. 이 같은 장기고용체계나 협력적 노사관계는 CME의 전형에 속하는 생산레짐 요소들이다.

이러한 생산레짐 성격을 띤 한국 경제가 노동시장의 유연성 극대화를 강조하는 LME 체제로 수렴될 것을 기대하거나 압박하는 것은 무리다. 또한 금융체계 및 기업지배구조 측면에서도 고용과 해고의 유연화를 포함한 기업 및 산업 구조조정의 일상화를 요구하는 LME식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로의 이행 압력 역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주주자본주의로의 이행은 한국의 기업들로 하여금 주주의 단기적 이익 극대화에 집착하게 하고, 따라서 장기적 투자와 기업특화기술의 개발에는 그만큼 무심해지도록 할 것이다. 고용체계도 장기보다는 비정규직의 증대 등을 통한 단기 위주의 것으로, 그리고 노사관계 역시 협력적이기보다는 분쟁적 관계로 (지금보다 더 빠르게) 전환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기왕 한국기업들이 그나마 누려오던 DQP 산업에서의 국제경쟁력마저 상당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의 경쟁력을 유지 또는 제고시키고자 한다면 LME 체제로의 이행보다는 오히려 CME체제를 공고히 하고 (필요하다면) 그 위에 혁신친화적인 LME적 장점을 부분적으로 추가시켜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주8) 그렇다면 장기고용체계와 협력적 노사관계 틀의 확립은 물론 기업지배구조도 '이해관계자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의 성격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감이 바람직하다. 고용의 안정과 확대, 기술투자의 증대,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기업지배구조의 강화 등은 기술집약적 상품의 국제경쟁력 우위를 지속시켜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주9) 결국 한국에 적합한 자본주의 유형은 장기투자자본체계, 이해관계자존중체계, 고숙련생산체계, 협력과 조정의 노사관계, 장기고용체계 등의 CME적 생산레짐 요소들이 어우러지는 자본주의여야하리라는 것이다.

넷째, 세계화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CME 체제여야 한다. 세계화에 따른 경제통합의 심화 및 확산 과정에서 산업 및 기업의 구조조정은 끊임없이 진행되기 마련이다. 혁신이 용이하지 않은 경제는 세계화 시대를 살아남기 어렵다. 그렇다면 예컨대 장기고용체계를 중시한다할지라도 그것이 어느 특정 기업 혹은 산업에서의 '종신고용' 보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곤란하다. 끊임없는 혁신을 위해서는 (LME체제에서와 같은 정도는 물론 아니겠지만) 노동시장의 유연성 증대는 불가피한 일이다. 문제는 그 필요한 정도의 유연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CME 체제의 다른 요구들을 어떻게 만족시켜갈 것인가에 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영국이나 미국 등의 LME 국가들은 서비스산업 등과 같이 기술이나 경영 혁신 혹은 신속한 구조조정이 관건인 첨단산업이나 신산업 분야에서는 CME 국가들보다 우월한 경향을 명백하게 보인다.(주10) 이는 단기고용체계, 분권적 노사관계, 그리고 단기 자본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금융체계 등과 상보관계에 있는 주주자본주의의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LME 체제의 장점은 일반적으로 상당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동반한다. 상시적 구조조정 환경은 양극화나 고용 불안의 문제 등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위에서 여러 변수를 염두에 두고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에 적합한 시장경제체제는 CME인 것이 분명하다. 한국에서 LME 체제를 발전시켜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이 '혁신 경제'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회경제적 비용을 최소화하면서도 혁신 친화적일 수 있는 CME 체제 구축이 절실한 까닭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flexicurity)이란 개념은 매우 유익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상기했듯 한국도 노동시장의 유연성 증대 필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급격히 변화하는 세계화 시대의 개방경제 환경 하에서 혁신을 위해서는 대내 조직의 유연화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유연화 과정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높은 실직이나 이직 그리고 그에 따른 각종) 개인적 손실이나 불안에 대한 사회적 분담 혹은 '사회화' 기제를 잘 마련해 놓을 경우 거기서는 단순한 유연성이 아니라 유연안정성이 증대될 수 있다. 말하자면 유연성이 안정성의 기초 위에서 증대된다는 것이다. 이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active labor market policy, ALMP)과 공적 평생교육제도의 도입, 그리고 사회안전망의 강화 등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예컨대 생산성이 낮은 어느 기업이나 사양산업의 노동자가 실직할 경우 그를 생산성이 높은 기업이나 산업으로 이동케 함을 목적으로 실직 기간 중 한편으로는 생계비 등 실업 관련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직업재훈련이나 업무재배치 훈련 등을 받도록 하는 정책이다.(주11)

ALMP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의 경우는 대부분 튼실한 사회안전망과 복지체제를 함께 갖추고 있는 까닭에 실직자가 새 직장을 얻기까지 직업훈련을 받는 기간 동안에도 교육, 의료, 주거 비용 등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체계를 갖추어간다면 기업 차원에서는 유연성이 그리고 노동자 개인이나 사회전체 차원에서는 안정성이 동시에 증대될 수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 확보 방안이 시사하는 바는 세계화 시대가 요구하는 혁신 친화적 CME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결국 복지자본주의를 지향해야한다는 점이다. 이는 위의 두 번째 원칙과 맥을 같이하는 결론이기도 하다. 잘 갖추어진 사회안전망과 복지체계가 개방경제 하의 산업 및 기업 구조조정을 순조롭게 한다는 것은 이미 이론과 경험에 의해 공히 증명된 사실이다.(주12) 그러한 제도와 정책이 경제통합이나 시장개방에 따른 구조조정의 부작용을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통합 기제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의 시장경제체제는 복지주의 CME 체제여야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합의제 CME여야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한국에 적합한 시장경제체제는 ① LME가 아닌 CME, ② 격차문제 해결에 유능한 CME, ③ 고품질 특화 상품 생산체계에 부합하는 즉 장기고용체계, 협력적 노사관계, 이해관계자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CME, 그리고 ④ 복지주의 CME를 지향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원칙들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 가치는 '사회 공동체와 연대'라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①번 원칙에서의 CME 정의 그 자체가 시장의 (사회적) 조정을 의미한다는 점, ②번 원칙은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격차 해소를 강조한다는 점, ③번 원칙은 장기 신뢰관계에 기반한 상생적 이해관계자자본주의를 선호한다는 점, 그리고 ④번은 사회통합형 혁신 경제를 위한 사회복지의 중요성을 부각한다는 점 등이 모두 그것을 말해준다.

사회 공동체와 연대의 가치가 존중되고 보장되는 자본주의의 실현은 시장이 사회적 영향력 하에 놓여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즉 시장이 사회 구성원들 간의 협의나 합의에 의해 조율되고 조정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분배와 생산성 간 혹은 형평성과 효율성 간의 균형점, 그리고 복지의 양과 질의 적정선 등은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 스스로가 직접 협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다만 모든 구성원들의 참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한국적 상황에서 작동 가능한 사회적 협의나 합의 방식을 창안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유럽의 합의제 CME 국가들처럼 사회적 조합주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 해법이긴 하겠으나, 이 경우에도 사회 협약의 의제와 수준, 참여 집단의 범위, 운영 형태 등은 모두 한국의 고유 사정에 맞추어 정해져야한다. 어느 경우이든 합의제 CME를 발전시켜가겠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참여 집단들 간의 동등한 파트너십이 보장돼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협의나 합의의 장은 지속되지 못한다. 여기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국가는 노동이나 중소상공인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 집단들을 '특별' 지원함으로써 그들이 자본이나 대기업 등의 강자 집단과 동등한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수행해야한다.

3. 합의제 CME와 합의제 민주주의 간의 친화성

'경쟁력 조합주의'(competitive corporatism)를 포함한 사회적 조합주의 방식의 합의제 CME는 다수제 민주주의보다는 합의제 민주주의와 일종의 제도적 친화성을 갖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주13) 전술한 다수제 민주주의와 합의제 민주주의의 특성을 상기해보더라도 이는 쉽게 이해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

승자독식 모델인 다수제 민주주의에서는 선거에서 승리한 정치세력이 정치권력을 독차지한다. 그들은 자신들만으로 정부를 구성하고 패자나 저항 혹은 거부 세력(veto power)에 대한 배려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결국 정권교체기마다 정치과정에서의 소외 세력은 양산되고 따라서 이들과 정부 간 그리고 입장이 다른 이익집단들 간의 적대적 대립과 갈등은 상시적 문제로 존재한다. 이러한 정치 환경 하에서 합의제 CME가 생성 혹은 발전할 가능성은 낮다.

한편, 승자독식이 제도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그리하여 정치세력 상호간의 의존과 협력이 필수적인 합의제 민주주의에서는 정치권력이 분배되며 따라서 정치과정은 양보와 타협에 의해 진행된다. 여기서는 약자나 소수자 그리고 저항 혹은 거부세력에 대한 포용이 일상의 정치문화로 자리 잡게 된다. 합의제 CME가 발전하기 좋은 정치적 토양이 제공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앞서 합의제 CME의 근간인 사회협약체제의 성공적 운영을 위해서는 참여 집단들 간의 동등한 파트너십을 보장해주는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였는데, 그러한 국가의 역할은 바로 합의제 민주주의에서 기대하기 용이한 것이다. 예컨대, 그 국가는 약자일 수밖에 없는 노동에 힘을 실어주어 노사관계가 동등한 파트너십을 전제로 하여 건설적이고 평화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유력한 친(親)노동 정당이 있어서 그 정당이 국가 혹은 정부의 정책결정에 노동의 편에 서서 상시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한다. 중소상공인이나 농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그룹 역시 (그들이 만약 사회협약체제의 파트너로서 참여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면) 각각 자신들의 정치적 대리인을 확보하고 있어야한다. 말하자면 합의제 CME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주요 사회경제 집단들의 선호와 이익을 정치적으로 대리할 수 있는 이념 혹은 정책 정당들이 포진해있는 소위 '구조화된' 다정당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합의제 민주주의의 전형적 정당체계임은 앞서 지적한 대로이다.

전술했듯,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선진국들은 다수제가 아닌 합의제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들 모두가 나름의 합의제 CME를 발전시켜왔음에 주목해야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들의 합의제 민주주의였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상기해보자. 합의제 민주주의의 핵심은 국회의석을 정당 득표율에 비례하여 각 정당에게 배분하는 비례대표제다. 여기서는 지역이나 인물이 아닌 정책과 이념 중심의 선거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약자와 강자, 소수자와 다수자 등 시민사회의 다종다양한 세력들을 대변하는 구조화된 다정당체계가 발전한다. 유력 정당의 수는 통상 셋 이상이기 마련이므로 단일 정당이 국회의석의 과반을 차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의원내각제로 구성되는 행정부의 일반 형태는 연립정부다. 국민의 뜻을 해석하고 구현하는 일, 즉 민주국가를 운영하는 일이 이념 혹은 정책에 의해 구조화된 정당들 간의 합의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행정부는 의회의 효과적인 견제와 감시를 받는다. 약자와 소수자를 대변하는 유력 정당(들)이 이러한 행정부 혹은 입법부에 상시적으로 포진해 있으므로 합의제 CME의 국가 역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의 대안체제로서 한국형 합의제 CME를 구축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일과 병행하여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동일한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유럽의 합의제 CME 국가들이 거의 예외 없이 비례대표제, 구조화된 온건다당제, 그리고 의원내각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주14) 신자유주의의 대안 모델 작성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합의제 민주주의의 형성에 필요한 정치제도들을 갖추는 일이란 것이다. 그 시작은 비례대표제의 전면 도입 등과 같은 선거제도의 개혁이여야 한다. 전술했듯, 선거제도야 말로 정당체계, 행정부 형태, 그리고 권력구조 등을 결정하는 민주주의 핵심 제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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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자본주의의 다양성에 대한 이하 논의는 졸고, "신자유주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최태욱 편, 『신자유주의 대안론』 (파주: 창비, 2009)에서 인용.

주2) Kathleen Thelen, How Institutions Evolv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주3) Peter A. Hall and David Soskice, "An Introduction to Varieties of Capitalism", Peter A. Hall and David Soskice eds., Varieties of Capitalism: The Institutional Foundations of Comparative Advantag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주4) David Soskice, "Divergent Production Regimes: Coordinated and Uncoordinated Market Economies in Contemporary Capitalism," Herbert Kitschelt, Peter Lange, Gary Marks, and John D. Stephens eds., Continuity and Change in Contemporary Capital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주5) 안재흥 <서구 자본주의의 다양성과 성장-복지 선순환의 정치경제>, 『한국형 조정시장경제체제의 모색』 2008년 국회연구과제. 폴라니 이론틀의 출처는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Boston: Beacon Press 1944.

주6) 양재진. 2006. "한국의 대안적 발전모델의 설정과 민주적 국가자율성 및 국가능력의 복원을 위하여," 『국가전략』 12권 2호, pp. 128-129.

주7) 안재흥. 2006. "정책레짐, 고용 및 실업의 정치, 그리고 노사정 관계: 서유럽 강소국의 경험과 한국의 진로," 『한국형 사회협약의 모색과 복지국가』. 수원: 경기개발연구원.

주8) 이 점에서 한국형 시장경제체제가 CME에 기초하여 LME적 요소를 일부 수용하는 일종의 혼합형 체제로 가야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주9) 안재흥(2008)

주10) Soskice(1999), pp. 113-114.

주11) Henry Milner, Sweden: Social Democracy in Practice,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주12) Peter Katzenstein, Small States in World Markets: Industrial Policy in Europe.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5); Dani Rodrik, "Sense and Nonsense in the Globalization Debate," Foreign Policy 107, Summer 1997; Geoffrey Garrett, Partisan Politics in The Global Econom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Rieger Elmar and Stphen Leibfried, Limits to Globalization: Welfare States and the World Economy. Cambridge: Policy Press 2003.

주13) Lijphart(1999)

주14) Duane Swank, Global Capital, Political Institutions, and Policy Change in Developed Welfare Stat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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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프레시안. 2009.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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