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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서] 지구지역학으로서의 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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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8-14 21:38 조회34,3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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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의 발전방향에 대한 논의 자체는 새로울 게 없을 정도로 무성하다. 이런 상황을 잘 알면서도 필자는 한국학이 새로운 정체성을 갖추는 데 필요한 지적 자극을 주려는 뜻에서 평소의 짧은 소견을 펼쳐보려고 한다. 그 방향은 한 마디로 ‘지구지역학으로서의 한국학’의 재구성이다. 

 

 아주 생소한 신조어인 지구지역학(Glocalogy)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보다 덜 생소한 글로컬리즘(glocalism)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순서이겠다.

 

 글로컬리즘은 글로벌리즘(globalism)과 로컬리즘(localism)의 합성어이다. 이 합성어는 1990년대 초부터 쓰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think globally, act locally)”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하는 개인·집단·단위·조직 등을 의미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전지구화의 영향 속에 다양한 용법으로 여러 영역에서 쓰이고 있지만, 여기서는 지역(local)에서 전지구(global)에 이르는 공간성의 다양한 규모(scale)를 연결시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규정하면 족하지 싶다. 달리 말하면, 지방적인 것(local)과 지역적인 것(regional)과 전지구적인 것(global), 또는 미시적인 것(micro)과 중간적인 것(meso)과 거시적인 것(macro)을 하나의 차원으로 결합하는 사고와 행동이라고 이해하려고 한다.

 

 필자는 글로컬리즘에 입각해 수행하는 학문을 글로컬로지(Glocalogy)라고 이름붙인 바 있다. 같은 한자권인 타이완에서는 글로컬리즘을 ‘전구본토화(全球本土化)’라 번역하고, 일본에서는 영어 발음 그대로 표기하는데, 이를 우리 말로 옮기면 ‘지구지역화’ 정도가 될 것이니 그에 따라 글로컬로지를 일단 ‘지구지역학’으로 불러도 좋지 않을까 한다. 그 핵심은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에 뿌리내린 학문, 또는 지방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과 전지구적인 것을 하나의 차원에서 결합해 분석하는 학문이 될 터이다.

 

 그런데 낯선 용어인 이 지구지역학을 한국학과 연관시킨다는 것은 또 어떤 뜻인가. 한국학은 잘 알다시피 한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민족(nation)을 분석단위로 한 학문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학은 내적 모순에 직면해 있다. 한편으로는 그 학문적 작업을 제한하는 국가/민족이란 틀에 대해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민족에 기반한 한국학이라는 분야를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긴장 속에 처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모순으로부터의 탈출구로서 필자가 착안한 것이 한국학을 지구지역학으로 재구성하자는 구상이다. 그것은 하나의 시각이자 방법인 동시에 연구영역을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지구지역학을 통해 한편으로 서구 중심의 보편주의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이란 공간성을 중시하면서도 특수성에 매몰되지 않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학문의 길을 한국학이 추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렇다면, 지구지역학으로서의 한국학이 제도적으로 정착될 가능성이 있는가. 이에 대해 몇가지 단상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지구지역학으로서의 한국학이 제도적으로 과감하게 추구해야 할 방향은 한국학과 연계할 수 있는 참여 인력들을 널리 포용하는 것이다. 예컨대, 해외 대학별로 한국학 프로그램의 존재 유무를 따져 협력대상을 고르기 보다는 한국학 전문인력의 양성과 더불어 중국학이나 일본학 및 동남아학 또는 그밖의 분과학문의 전문인력과도 제휴하는 ‘전략적 연구제휴망’(strategic research alliance network)을 짜기 위해 단기․중기․장기별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 다음으로, 지구지역학으로서의 한국학은 통합학문의 성격을 갖는 것이므로, 또하나의 분과학문 영역으로 대학제도 안에 비집고 들어가기보다는 대학 내 연구소에서 활성화할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사실 대학 안에서 분과학문제도의 변화를 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런 점에서 더더욱 연구소를 거점으로 한국학의 새로운 정체성을 실험해봐야 한다. 특히 연구소 안에서 여러 전공의 연구자들이 사회의제를 학술의제로 전환하고 그 의제를 중심으로 연구를 재구성하면서 연구의 집중성과 유기적 연관도를 제고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연구의 주체(subject)와 대상(object)이란 이분법이 프로젝트(project)로서 용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은 한국에서의 한국학이 주체성과 실천성을 강화하는 특성이 있었다는 유산과 맞닿아 있다. 이 특징이 종래에는 민족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만들었지만, 지구지역학으로 재구성된 한국학은 지방적인 것, 지역적인 것 및 전지구적인 것을 하나의 차원으로 결합하는 학문인만큼 그로부터 자유롭다. 이제 한국의 안과 밖에서 수행하는 새로운 한국학은 저마다의 ‘장소를 갖고(take place)’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는(take place)’ 구체적인 상황에 주체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소통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 때  주변에 위치한 우리는 모두가 주고 모두가 받는 ‘만남의 장소’에 비로소 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한국학의 진정한 세계화이다.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

(서남통신. 2009.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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