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엽] 윤리적 소비자-시민의 시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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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9-03 19:44 조회33,6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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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패티를 굽거나, 떡볶이집의 가족 종사자로 일하거나, 파견 근로자로 계단을 청소하거나, 카센터에서 엔진오일을 갈거나, 학습지 교사로 아파트를 돌아다닐 때, 혹은 보육원 보조교사로 일하거나 보험 외판을 위해서 거리를 헤맬 때 당신은 고단하다. 수도권 외곽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로 출근하는 당신, 신도림 전철역에서 환승의 물결에 실려 있는 당신은 고되다. 하지만 이따금 혹은 빈번하게 굴욕감을 느끼게 되는 노동의 세계로부터 벌어들인 돈을 들고 시장과 백화점과 인터넷 쇼핑몰에 있을 때 당신은 주인이다. 화폐 소지자이고 소비자인 한에서 당신은 왕이고 주권자이다.
하지만 소비자로서 당신의 권능은 너무 강한 것이어서 기업들은 당신을 고분고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모든 일을 해왔다. 거대한 산업이 되어버린 광고가 그렇고, 고객 관리 기법이 그러하다. 신용카드를 매개로 해서 당신을 분석할 개인정보를 빼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당신은 광고에 유혹되고, 포인트와 마일리지에 엮이고, 쿠폰과 할인가와 바겐세일과 1+1과 경품에 자기도 모르는 새 낚이곤 한다. 정치적 주권이 기표소 안의 짧은 순간으로 축소되듯이, 소비자주권 또한 상품이 부르는 사이렌의 노래에 이끌려 너무 쉽게 난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주권자의 자리를 되찾을 기회를 이미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만약 당신을 유혹하는 모든 미끼가 상품가격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소비의 순간에 신중해지기만 한다면,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과 힘을 합쳐 소비를 정치적 행위로 승화시키기만 한다면, 당신은 원하는 소비에 이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원하는 세상에 살 수도 있다. 그것은 소비자에서 소비자+시민으로 이행하는 길이다. 거기에 더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소비를 조직한다면, 우리는 ‘윤리적 소비자-시민’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생소한 존재가 아니다. 의식적으로 유기농 제품과 공정무역 제품과 로컬 푸드를 소비할 때, 동물복지에 입각한 축산물 제품을 구매할 때, 당신은 이미 윤리적 소비자-시민이다.
윤리적 소비자-시민의 힘은 의외로 강하다. 지난해 우리 사회를 밝힌 촛불에서 보듯이 윤리적 소비자-시민의 결집은 국가 정책의 중심에까지 파고드는 힘을 가지고 있거니와, 생산과 소비의 연결고리에 대한 통찰력이 깊을수록 윤리적 소비자-시민의 개입능력은 커진다. 그것의 좋은 예가 촛불항쟁의 적자라고 할 수 있는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이다. 무가지를 살포하며 공론장을 오염시키고 분파적 이익을 탐닉해온 한국의 보수신문들은 광고를 주 수입원으로 만듦으로써 신문 소비자의 압력으로부터 면제되어 왔다. 절독운동을 무력화하는 이런 상황을 촛불시민과 언소주는 2차 불매운동, 즉 조중동이 아니라 조중동 광고주에 대한 소비자 운동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이 얼마나 정확하게 문제의 핵심에 파고드는 것인가는 캠페인 초기의 즉각적인 효력, 그리고 그것에 대해 조중동이 내보인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윤리적 소비자-시민의 ‘위험함’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언소주 회원 24명을 기소했고, 올봄에는 1심에서 일부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1심 판결 취지에 따라 조정된 언소주 운동은 저강도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의 통찰력과 활동 레퍼토리는 이미 윤리적 소비자-시민 행동의 자산이 되었으며, 정치 환경이 달라진다면 방대한 힘을 발휘할 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생산과 노동자-시민의 영역에서 패배가 잦은 이 시대에 윤리적 소비자-시민은 저항과 변혁의 새로운 준거점이 될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09.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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