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 치명적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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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3-09 08:40 조회20,74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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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 아니, 스노 화이트의 탄생은 참 인상적이다. "한겨울, 하늘에서 하늘하늘 깃털처럼 눈이 내리고 있던 날, 눈처럼 새하얗고, 피처럼 붉고, 흑단 나무처럼 거무스름한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백설공주는 성장하면서 우여곡절을 겪게 되고, 이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낳는다.
백설공주 설화의 대리인 문제
백설공주를 경제사의 맥락에서 읽을 수 있겠다. 백설공주는 반봉건적 혁명을 꾀하는 반란군에 동조하여 혁명 정부 수립에 동참하는 봉건 영주의 딸이라는 것이다. 사춘기 소녀의 오이디푸스적 투쟁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왕비는 공주가 자신을 능가하리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고 마법의 거울에서 딸의 모습을 보면서 성장을 억누르려 한다. 그러나 공주는 결국은 유혹과 자아도취를 넘어 더 높은 차원의 성숙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난쟁이에 주목하는 경우도 있다. 한 연극에서 마법거울은 말한다. "백설공주님을 가장 사랑했었던 분은, 안개숲의 안개꽃밭, 그곳에 잠들어 있는 난쟁이였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사냥꾼에게 더 눈길이 간다. 잘 알려진 것처럼, 왕비는 사냥꾼에게 백설공주를 없애라고 지시하지만, 사냥꾼은 공주를 놓아주고 만다. 오이디푸스적 관계로 보면, '못돼 먹은 여자'는 딸의 성장을 질투하는 경쟁자의 역할을 맡게 되며, 사냥꾼은 소녀의 무의식에서 보호자의 상징인 아버지를 표상한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이라면, 이보다는 사냥꾼에게서 정보의 비대칭성이 초래한 '대리인문제'(agency problem)를 떠올릴 것 같다. 일을 직접 행하는 대리인은 일을 맡긴 주인에 비해 훨씬 정확하고 풍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인이 의도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다.
왕비가 배신을 당한 것은 왕비와 사냥꾼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의 비대칭성 때문이었다. 사냥꾼은 왕비와 명령과 복종의 계약을 맺기 전부터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길 수도 있고, 계약 후 왕비의 의도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
옛이야기는 사냥꾼이 어느 순간 동정심을 느껴 백설공주를 놓아주는 것으로 어슴프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후일 왕비에게 치명적 위험을 초래하게 된 사냥꾼의 행동에 대한 설명으로는 왠지 석연치가 않다. 아마 애초부터 왕비는 명령을 수행하는 데 적절치 못한 사냥꾼을 선택했을 수 있다(역선택). 아니면 원래는 사냥꾼이 왕비에게 충성스러웠는데, 어떤 계기에 의해 백설공주를 놓아주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많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도덕적 해이).
왕비는 대리인의 기회주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향후 공주가 귀환하는 단초를 열게 된다. 그렇지만 왕비가 사냥꾼의 속성과 행동에 대한 정보를 사냥꾼 자신만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왕비의 입장에서는, 정보가 비대칭적인 상황 속에서도 사냥꾼이 왕비가 의도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어떻게 유인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문제 해결의 한 가지 방법은, 사냥꾼을 잘 감시하는 것이다. 왕비는 사냥꾼이 가져온 짐승의 심장에 속고 말았으나, 이는 사냥꾼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히 관찰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냥꾼에 대해 보증을 구하는 것도 방법이다. 사냥꾼이 왕비를 거역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 또는 그러한 행동으로부터 생기는 손실을 왕비에게 보상하게 하는 것을 보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이 역시 쉽지는 않지만, 사냥꾼과 왕비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계약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은행법 논란에도 적용될 잣대
지금 은행법 개정안이 논란 중에 있다. 본질적으로 기업가는 주인 있는 자금을 끌어다 이용하는 대리인의 위치에 있다. 은행법의 목적이 국민경제의 이익과 부합하는 것이라면, 대리인이 꼭 주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이유가 없다는 교과서의 이론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심지어 세계경제가 대리인들의 기회주의 행동으로 치명적 위험에 빠져 있는 와중임에도, 산업과 금융 사이에 파이프라인을 놓는 것을 '경제 살리기'라고 밀어붙인다. 칠판 가까이 있는 필자는, 지금, 두렵다.
이일영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일보. 2009.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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