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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일] 시장과 법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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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2-11 22:42 조회20,9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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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과 법, 사회를 조직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원리다. 선진적인 나라일수록 시장과 법이 발달했다. 선진화를 내세우는 뉴라이트 이론가들과 현 정부도 시장과 법을 앞세운다. 그러나 과유불급인지라 시장만능주의나 법 만능주의의 폐해도 심각하다.

 

시장은 매우 효율적인 사회조직 원리다. 각 개인이 아무런 사회적 고려 없이 저마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행동하더라도 시장은 가격 메커니즘을 통해서 한 사회의 자원을 적절히 배분해 준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등의 박애심 때문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한 결과 때문”이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인의 이기심을 효율적 자원 배분으로 이끄는 것이다. 나아가 이기심은 경쟁을 낳고, 경쟁은 혁신을 낳는다.

 

그런데 과연 개인의 이기심과 시장원리만으로 경제가 잘 돌아가고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까?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남을 속이거나 남의 것을 빼앗으면 시장은 무너진다. 그래서 법이 필요하다. 벌을 받는다는 두려움을 이용해서 반사회적인 행위를 규제하는 것, 이것이 법의 원리다. 이기심에 입각한 시장경쟁이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공포심에 입각한 법과 규칙의 준수가 전제되어야 한다.

 

시장과 법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탐욕과 공포를 바탕으로 사회를 조직한다. 비현실적 이상론과는 달리 개인의 도덕성이나 사회적 책임성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현 가능성이라는 면에서 엄청난 장점을 지닌다. 하지만 시장과 법에만 의존하는 것은 두 가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이기심이 반드시 합리적 행동을 낳는 것은 아니다. 이기심이 극에 달한 월가의 금융자본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돌아보라. 앨런 그린스펀은 시장에 맡기면 금융기관들이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위험관리를 잘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 실수였다고 고백했다. 시장만능주의 경제이론은 탐욕이 클수록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행동을 선택할 것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탐욕은 판단을 흐린다. 월가의 투자은행을 거쳐 지금은 하버드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있는 테리 번햄은 <비열한 시장과 도마뱀의 뇌>라는 책에서 개인투자자들의 행태나 금융시장의 움직임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보여준다. 우리 머릿속에는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도마뱀의 뇌가 들어 있어서 중요한 순간에 합리적 판단보다는 충동적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탐욕과 공포는 우리를 충동적 선택으로 이끄는 가장 원시적인 감정이다.

 

둘째, 시장과 법은 비용이 많이 드는 방법이다.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돈을 벌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돈도 많이 줘야 하고 감시도 잘해야 한다. 일 자체가 좋아서 하는 사람보다 훨씬 비용이 많이 든다. 법이 제대로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위법이 처벌로 이어지는 확률을 높여야 하니, 감시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시장과 법이 만들어 낸 결과가 공평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반발한다. 이걸 제압하는 데 또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탄압 비용이다.

 

일 자체의 보람 때문에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의식 때문에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 것에만 기대는 것은 물론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 건강하고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욕심과 공포의 몫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사랑과 연대를 확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장과 법만 내세우다 보면 가뜩이나 부족한 사랑과 연대를 더욱 위축시킬 것이다.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한겨레. 2009.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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