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 2009년 분단현실의 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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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4-15 22:36 조회20,94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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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
2009년이 아직 3분의2 이상 남았지만 되도록 ‘지금 이곳’의 상황에 밀착한 성찰을 하려는 취지로 연도를 명시했습니다. 남북관계를 보나 국내현실을 보나 2009년 4월 현재의 상황은 심각합니다. 불과 1, 2년 전과 비교하더라도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는 개탄이 나올 법하지요.
이런 상황을 성찰하면서 ‘분단현실’이라는 각도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때 ‘분단현실’은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뿐 아니라 그 남쪽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적용되는 개념입니다. 한국의 현실은 어디까지나 분단국의 현실이요 분단체제의 일부로 존속하는 사회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유달리 성찰을 저해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성찰의 기본은 자신에 대한 반성인데 분단현실은 남 탓하기에 꼭 좋은 여건입니다. 애초에 분단을 강요했던 외세를 탓하고, 남북이 서로를 탓하고, 내부의 비판자마저 상대방 또는 외세의 앞잡이로 따돌리는 일이 습관화되어 있는 현실이지요. 동족상잔의 업보로 한국전쟁 이후 분단이 더욱 굳어진 이래, 성찰부재의 풍토는 한반도의 분단구조가 일정한 자기재생산력을 갖는 ‘분단체제’로 뿌리내리는 데 한 몫을 했습니다. 흔히 분단체제의 특성으로 남북의 기득권세력이 일종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듭니다만, 이런 공생관계가 가능해지는 데도 남을 탓하면서 성찰 없는 인생을 지속하는 우리네 마음의 타성이 작용했을 터입니다.
2. 삼중의 위기와 분단체제
1) 3중의 위기
흔히 한국사회는 지금 경제위기와 더불어 민주주의와 남북관계가 동시에 위협받는 3중의 위기에 봉착했다고 말합니다. 그중 경제위기는 세계적인 요인의 작용이 더 큰 게 사실이지만, ‘중산층과 서민경제’에 초점을 맞출 경우 분단의 영향을 한층 실감할 수 있습니다. 실은 한국경제의 전반적인 위기상황도 분단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지요.
2)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상호연관성
이명박정부 출범 이래 한국 민주주의가 후퇴해온 현실은 가히 참상이라 이를 만합니다. ‘용산 참사’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입니다. 철거민들의 구체적인 잘잘못이 무엇이었건 공권력에 의해 국민들이 무자비하게 공격당해 죽어 나간 상황에서 정부와 집권세력은 희생자들만 나무라고 그들의 인권이나 민주적 절차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관심했습니다. 인권무시와 민주주의파괴는 지금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지요. 삼권분립 등 어렵게 쟁취한 민주적 원칙들이 크게 흔들리고 있으며, 민주화과정에서 정부의 통제로부터 상당한 자율권을 확보했던 언론은 다시 정권의 직접적인 장악 하에 들어가거나 소수의 거대신문 및 재벌에 넘겨질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정황들을 하나하나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악하고 분노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다만 우리의 경악이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도저히 역행할 수 없이 확립되었다고 믿었던 탓이라면, 이 또한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이 미흡했던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이 맞물려서 진행되어온 것은 하나의 상식인데다,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도 분단체제(또는 ‘1953년체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남한만의 성과였다는 점에서, 20년의 민주화과정을 겪은 뒤에도 “비록 군부 쿠데타에 의한 역전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지만 [민주주의의] ‘불가역적 달성’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진단이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이는 1997년 IMF사태 이래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에 투항함으로써 민주주의의 후퇴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주장과는 다른 발상입니다. 진보진영 일각에서 제기되는 ‘97년체제’론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의도에서 출발하지만 97년체제론과 우파 담론은 뜻하지 않게 서로 공명하는 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는데, 지금쯤은 97년체제론자들 자신도 진짜 민주주의 후퇴가 어떤 것인지 ‘끓는 국맛’을 보고 있겠지요. 요는 개혁정권하
3) 남북관계의 악화와 분단체제의 특성
국내의 민주화작업이 분단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통찰할 때, 작금의 민주주의 후퇴가 남북관계의 악화를 수반한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물론 민주화와 남북관계 발전이 일대일로 상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북화해의 꾸준한 진전 없이 민주화가 지속될 수 없듯이, 민주주의의 후퇴가 일정 수준을 넘는 상황에서 남북관계만 잘 될 수도 없다고 봐야겠지요.
그런데 분단체제론을 주창해온 저 자신도 이런 당연한 사태전개를 충분히 예견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명박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안 한 축입니다만, 남북 경제협력만은 그가 ‘실용주의자’답게, 그리고 보수정권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과감하게, 추진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더랬지요.
하지만 오늘의 남북관계는 그야말로 참담합니다. 민족화해의 상징이던 금강산관광이 막힌 지 오래고 개성관광도 중단되었으며 개성공단은 잔뜩 위축되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전세계의 주목과 갈채 속에 연결됐던 남북의 철길도 다시 끊어진 상태입니다. 남북간에 쏟아지는 불신과 적대감의 표현을 보면, 6·15공동선언 이후의 신뢰구축노력은 고사하고 90년대 초에 상호 인정과 존중을 약속한 남북기본합의서 이전으로까지 돌아간 느낌입니다.
저는 이것이 이명박정부의 어떤 일관된 전략이나 이념 때문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물론 지난 정권들의 대북정책과 다르게 하겠다는 이념적 지향도 있고 계획도 있었겠지요. 게다가 국내문제에서 그렇듯이 국정담당세력의 전반적인 무능과 무정견(無定見)·무교양(無敎養)도 크게 한몫했습니다.
그러나 분단현실을 차분히 성찰할 때 이 모든 요인들의 결합에는 분단체제 특유의 어떤 특징이 관철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대통령 자신이 비록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와 분리시켜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하고 싶어도, 민주주의와 민생의 퇴보로 국내 민심을 잃었을 때 마지막으로 의지할 것은 거대신문 등 사회의 요소요소를 점거하고 있는 기득권세력입니다. 작년의 촛불시위 이후 벌어진 상황이 바로 그것이지요. 정권담당자로서는 일시적인 응급처방으로 저들을 이용하고 한숨 돌린 뒤 다시 대북정책을 국내정책과 분리해서 추진할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단체제의 성격상 한쪽에서 수구세력이 득세하면 상대편에서도 비슷한 메카니즘이 작동하기 마련이고, 남북관계 악화의 책임은 저쪽에 있다는 ‘남의 탓’ 습성이 새로 힘을 얻게 됩니다. 궁여지책으로 ‘집토끼나 챙기자’고 선택했던 대북강경책이 어느덧 손쉽게 여론의 지지도를 높이는 방도로서 집권자를 유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유혹에는 치명적인 착시현상이 끼여 있습니다. 오늘날 남북관계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 것 같지만 실은 남북간에 약간의 충돌만 있어도 한국경제가 요동치고 국민들이 사재기에 나서던 6·15 이전과는 천양지차의 상황입니다. 이명박정부가 ‘기다리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것도 지난 10년 동안 쌓아놓은 기반 덕분이지요. 게다가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 등장으로 한반도 긴장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는 안 가리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남북대결을 빌미로 독재정치를 수행하던 박정희시대를 복원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결과적으로 분단체제의 동요는 계속되면서 그 극복의 길이 묘연해지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되 권위주의 질서의 확립도 불가능한 어정쩡한 혼란기가 연장될 우려만 커지고 있습니다. 남북관계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에 어떤 획기적인 전환이 요청되는 시점입니다.
3. 성찰 부재의 유형들
1) 수구세력의 타산과 맹목
앞서 말씀드렸듯이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의 부족은 분단체제를 존속시키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이는 어떤 사회현실이 일종의 체제로 자리잡음으로써 획득하는 일반적인 속성이기도 하지요.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특정 현실을 마치 자연스러운 환경인양 받아들이게끔 사람들이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도 우리 사회에는 분단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이를 자신들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데 극도로 유능한 세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누가 문제삼을 때마다 ‘남북분단의 특수상황’에서 불가피한 제도라고 우겨대고,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을 ‘친북’이요 ‘빨갱이’로 몰아세우곤 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은 없지만 분단을 누구 못지않게 의식하며 약삭빠르게 이용할 줄 압니다. 그리고 북한정권을 소리 높여 비난하지만 결과적으로 북의 기득권세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며 그 점을 딱히 앞아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진정한 보수주의가 아닌 수구세력이라 일컬어도 틀린 말이 아니겠지요. 대한민국의 참 보수라면 민주주의를 포함한 대한민국 60년의 정당한 성과를 간직하고 지켜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 분단체제의 변혁을 꿈꾸지는 않더라도 분단체제가 흔들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동요기를 관리하는 능력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분단체제가 굳건했던 시기로 되돌아가려는 부질없는 시도로 도리어 혼란을 조장하거나, 북한정권의 조기 붕괴라는 개연성도 희박하고 감당할 대안도 없는 사태를 꿈꾸는 공상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저들의 반북주의가 남녘에서 당장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데 유용하다는 점에서 결코 몽상가들만은 아니지요. 어떤 의미로는 사익실현의 대가들이고 숙달된 기술자들인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2) 성찰 없는 통일운동의 역효과
이와 대조적으로 분단극복을 역설하며 더러는 이 목표를 위해 훌륭하게 헌신해온 통일세력이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도 분단을 의식하기는 하되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원래 외세에 의해 강요된 것은 사실이지만, 분단체제가 성립한 데에는 한반도 내부세력의 작용도 있었고 전쟁보다는 분단이 낫다는 주민들의 실감도 가세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를수록 분단현실에서 이득을 보는 특권층이 남과 북 양쪽에 상당한 기반을 갖게 되었습니다. 분단체제의 이런 범한반도적 성격을 무시하고 남녘의 극우세력과 주한미군만 사라지면 자주통일이 된다고 믿는 것은, 북쪽의 정권만 무너뜨리면 자유민주주의 통일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공상적입니다. 따라서 다수 국민을 통일작업에 끌어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민간통일운동을 친북행위로 몰고 가는 수구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하기 십상입니다. 이처럼 분단체제 극복에 실질적인 기여를 못하는 분단극복운동 내지 ‘민족해방’운동을 진정한 진보로 인정하기는 힘들겠지요.
3) 진보진영 일각의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후군’
진보의 이름을 걸고 전통적 통일운동세력의 진보성을 부인하는 지식인·활동가·정치인 가운데도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사례는 수두룩합니다. 그중 일부는 ‘반북좌파’라 일컬음직한데--우리 사회에는 친북좌파 외에 반북좌파도 있고 문선명 총재나 고 정주영 회장 같은 친북우파도 있지요--북한현실에 대한 그들의 비판에는 경청할 점도 많습니다. 그러나 분단체제 전체에 돌려야 할 책임마저 오롯이 북한정권에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수구세력의 북한 때리기와 상통하는 바 있습니다. 분단체제는 한반도의 남과 북 외에 세계체제의 주요 행위자들까지 관련된 복잡한 체제니만큼 그 특정한 국면에 대한 책임규명은 실로 복잡하고 다양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북한정권의 책임이 여타 행위자의 몫보다 확연한 경우마저 ‘분단체제 전체의 책임’ 운운하며 호도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분단체제는 남과 북의 모두가 참여하고 있는 매우 특이한 복합적 공동체로서, 어느 경우에도 참여자 개개인의 책임이 전무할 수 없습니다. ‘나는 멀쩡한데 쟤네들은 왜 저 모양이냐’라는 성찰부재의 태도를 진보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북까지는 아니더라도 북의 존재를 되도록 무시하면서 남한만의 발전을 꿈꾸는 세칭 진보세력이 의외로 많습니다. 특히 지식인·학자들의 세계에서 그렇지요. 이는 한국의 지식계가 이땅의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박은 공부보다 분단이 없는 외국의 현실에 연유한 이론의 학습과 전파에 치중한 탓이라 생각됩니다만, 아무튼 남북의 점진적 재통합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국가 또는 평등사회의 수립이라든가 남한의 독자적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건설 같은 주장을 ‘아니면 말고’ 식으로 내던지는 사례를 자주 만납니다. 저는 이를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후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만, 이런 식의 무책임한 진보주의가 적어도 단기적 현실대응력에서는 뛰어난 수구세력을 제압하지 못할 것은 뻔하지요. 아니, 때로는 수구세력에 대한 저항을 오히려 약화하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참된 진보와는 거리가 먼 것이지요.
4) 중도세력은 오합지졸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갖가지 편향된 입장을 떠나 중도를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좌우의 극단을 뺀 중간세력이라면 수적인 다수를 이룰지언정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선거철에 어떻게든 다수표만 긁어모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정객이라면 이들을 겨냥한 ‘중도 마케팅’으로 만족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는 선거가 끝나면 기존질서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수구세력과 기꺼이 손잡거나 적어도 휘둘리면서 적당히 세월을 보내고 다음 선거를 준비하는 거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칙 있는 중도, 일관된 경륜과 지속적인 실행력을 갖는 중도입니다. 단순히 중간지대에 많은 사람들이 포진해 있어서가 아니라 한반도 분단현실의 특성상 그 어떤 극단적 노선도 분단체제가 남북 주민들의 삶에 들씌워놓은 멍에를 벗기고 족쇄를 풀어줄 수 없다는 성찰을 바탕으로 정립되는 ‘변혁적 중도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4. 변혁적 중도주의: 성찰하는 진보와 합리적 보수의 만남
1) 변혁적 중도주의의 개념과 성립근거
‘변혁적 중도주의’는 현실정치의 표어로는 적당치 않습니다. 변혁이라는 낱말이 보수적 또는 중도적 성향의 사람들에게도 위화감을 주는 수가 있기도 하지만, ‘변혁’과 ‘중도’가 한데 묶인 사실 자체로도 대중적 구호의 간명함을 잃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변혁적 중도주의’로 하여금 한갓 표어를 넘어 개념으로 승격토록 해준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변혁의 대상은 한반도의 분단체제입니다. ‘분단체제’도 간단치 않은 개념입니다만 지금은 어느정도 공론화된 개념이므로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변혁’도 ‘혁명’을 에둘러 말하거나 단순한 ‘변화’를 더 그럴싸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발본적이면서도 꽤 장기적이고 굳이 폭력혁명을 수반하지 않는 사회변동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변혁적 중도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런 개념들에서 출발하여 몇가지 전제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첫째 분단체제가 더 나은 체제로의 변화를 요하는 억압적인 체제이고, 둘째로 그 변화의 내용은 전쟁이나 혁명일 수 없고 그렇다고 분단체제의 단순한 개량일 수도 없으며, 셋째로 더 나은 체제로의 변혁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등의 전제들입니다. 그럴 경우 분단체제의 변혁을 위해 폭넓은 중도세력이 힘을 합쳐야 하다는 결론은 쉽게 따라올 것입니다.
한반도의 남과 북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억압적이며 남의 경제력이나 북의 군사력에 비해 주민들의 삶의 질이 (각기 다른 정도로) 열악한 사회라는 점은 요즘 들어 한층 실감되는 주장입니다. 다만 분단을 만악(萬惡)의 근원으로 설정하는 것도 과학적인 태도는 아닌 만큼, 억압적인 현실의 어떤 부분이 분단에 기인했거나 분단 때문에 가중되고 있느냐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과제가 남습니다.
어쨌든 이런 현실을 전쟁이나 폭력혁명으로 타파하기에는 한반도가 너무나 위험한 지역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합니다. 반면에 한때 분단체제가 동요기 내지 해체기에 들어섰다는 희망에 부풀었던 이들조차 요즘은 분단체제 극복이 과연 가능할지, 차라리 분단체제가 다시 맹위를 떨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부분적인 개량이나마 시도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지를 고민하는 경우가 눈에 뜨입니다.
2) 분단체제의 복권은 불가능
최근에 한 소장학자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며 분단체제 극복노력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이제 10년간의 분단체제의 동요가 중단되고 다시 분단체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역사의 흐름이 전환된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필자는 기본적으로 여전히 분단체제의 동요하는 단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내부적으로만 보아도 남한에서 민주주의의 퇴행은 아직 구조화된 상황은 아니다. 작년 촛불항쟁이 보여준 것처럼 여전히 팽팽한 긴장상태에 있으며 민주주의를 계속 진전시키고자 하는 동력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국제적 상황도 주변국가들이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적어도 6자회담 메커니즘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도 남과 북의 모험주의적 행동에 제약을 가할 것이다. 냉전체제와 분단체제가 서로 조응하던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분단체제를 복권하려는 움직임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그러한 움직임이 실패할 경우 분단체제의 동요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가능성도 높다.”
다소 길게 인용한 것은 기본적으로 제가 동의하는 내용이기 때문이고, 아울러 한두 가지 의견을 여기에 덧붙임으로써 저의 생각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저는 분단체제의 동요가 지난 10년간이 아니라 1987년 6월항쟁 이래로, 그러니까 20여년에 걸쳐 진행되었다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한의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뒤이어 동서냉전이 종식되면서 분단체제는 중요한 기둥을 잃었고, 이명박정부 하에서의 남북관계 악화가 분단체제의 복권으로 귀결하려면 김대중·노무현 정권뿐 아니라 노태우 정권의 대북정책마저 물러야 하기 때문에 그 가능성이 더욱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분단체제를 복권하려는 움직임” 자체가 그것이 남북 어느 쪽에서 일어나는 것이든 분단체제가 가망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라 봅니다. 이남주 교수의 지적대로 지금은 “냉전체제와 분단체제가 서로 조응하던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남북대결을 강화함으로써 분단체제를 안정시킬 도리가 없으며, 분단체제의 억압성을 초보적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활용하던 시대도 세계경제의 변화로 이미 과거지사가 되었습니다. 안 될 일을 억지로 하려 드는 것은 위기를 심화시킬 따름입니다.
문제는 어차피 과거회귀와 현상유지가 다 불가능한 판에 어떻게 앞으로 나갈까 하는 것입니다.
3) 6·15공동선언에 대한 다양한 해석
남북관계의 발전에서 2000년의 6·15남북공동선언이 획기적인 돌파구를 열었다는 점은 누구나 쉽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남는 것은 이것이 단순히 남북관계의 돌파구냐 아니면 한국의 민주주의와 민생을 위해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느냐 하는 문제겠습니다.
앞서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부족의 몇가지 유형을 열거했습니다만 6·15공동선언을 접근하는 방식에서도 그 점이 잘 드러납니다.
예컨대 수구세력의 경우입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통일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쌍방의 합의가 이루어져 전쟁의 위협이 제거되고 화해협력의 과정을 통해 대한민국의 지속적인 발전이 보장될 뿐 아니라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등 ‘보수적’인 가치가 북녘에 전파될 가능성이 열린 것을 환영하련만, 보수보다 수구에 해당하는 세력은 6·15공동선언 제2항이 북측의 ‘고려연방제’를 수용했다고 비난하며 국론분열의 주범으로 낙인찍고자 합니다. 이는 물론 억지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저들 특유의 현실감각이 작용한 면은 있습니다. 6·15공동선언은 남북 양쪽의 기득권을 일정하게 보장하는 문건이지만, 강경한 남북대결의 지속만이 지켜줄 수 있는 과도한 특권들에 대해서는 위협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구세력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김정일 위원장 스스로 “냉전시대에나 하던 이야기”로 규정한 고려연방제가 아니라 노태우 정권 이래 남측이 주장해온 남북연합이 실현될 가능성이며, 따라서 6·15의 중도주의적 노선으로 국론이 단합되는 일이 없게끔 ‘현실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2항에는 별다른 관심을 안 보인 채 오로지 제1항에서 ‘우리민족끼리’ 자주통일하자고 두 정상이 합의했다는 점에서 6·15공동선언의 획기성을 찾는 일부 통일운동가들의 태도도 도움이 안됩니다. 6·15를 둘러싼 극과 극의 대립을 조장하기 쉬운 이런 태도가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세력에는 오히려 반가울 테지요. 더구나 북측이 ‘우리민족끼리’를 하나의 ‘리념’으로까지 승격시켜 매사에 적용하는 마당이니, 통일운동가들의 그런 태도는 마치 6·15공동선언이 남한 민중의 구체적인 삶과는 별개로 ‘친북’ 대 ‘반북’의 전선을 긋는 것으로 만들기 십상입니다.
반면에 IMF사태 이후 민중생활의 궁핍화를 특히 중시하는 쪽에서는 6·15공동선언을 그다지 획기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97년체제’라는 표현 자체가 6·15를 남북관계라는 ‘부차적 영역’에 국한된 사건으로 자리매기는 발상이지요. 본질적인 문제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서민경제의 파탄이라는 겁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서민경제의 파탄’은 오늘날 유달리 실감나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시점이기에, 1997년과 2000년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새롭게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IMF 구제금융을 계기로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서민경제의 파탄’을 일차 경험했습니다. 그 상황에 대응하는 한가지 방식은 오늘날 이명박정부와 추진하는 것과 비슷한 정책이었을 것입니다. 서민생활의 파탄에 아랑곳없이 신자유주의를 열성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에 따른 민심이반에는 5공식 ‘법질서 확립’과 김영삼 정권의 대북강경노선 계승으로써 대응하는 방식 말입니다. 물론 당시에 이미 10년의 민주화과정을 겪은 우리 국민에게 통할 수 없는 정책이었겠지요. 하지만 어쨌든 그런 가능성을 상상해봄으로써 우리는 김대중 정부 아래서 우리 국민이 실제로 선택한 길, 즉 금융위기를 계기로 흡수통일의 꿈을 접고 공안정국을 자제하며 남북의 화해·협력과 한반도 평화정착에서 한국경제의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한 길이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2009년의 시점에서도 그 길로 되돌아가는 것 말고는 민주주의의 회생도 서민생활의 안정도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4) 역주행을 막아낼 합리적 보수와 성찰적 진보의 만남
요는 민생과 민주주의, 남북관계의 ‘3중 위기’를 조장하는 이명박정부의 역주행을 막아내는 일입니다. 한가지 유리한 점은, 1997년과 달리 지금은 신자유주의가 본고장 미국에서마저 완전히 신용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점에서는 우리 정부만이 외로운 ‘나홀로’ 역주행을 하고 있는 형국이지요.
하지만 분단체제에는 그나름의 작동논리가 있어, 이 체제의 퇴행적 요소들이 일단 응집되기 시작했을 때 그 흐름을 바꾸기가 간단치 않습니다. 설혹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 예컨대 남북관계라는 특정 분야에서만은 좀더 실용적이고 전향적인 태도를 취할 생각을 품더라도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기제가 발동된 거지요. 이럴 때는 국민들이 대대적으로 나서서 큰 흐름을 바꿔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만 분단체제가 복합적인 것만큼이나 국민들도 ‘3중 위기’의 상호연관성을 통찰하며 복합적인 전략으로 대응해야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존의 잣대에 얽매임이 없이, 성찰하는 진보와 합리적 보수가 만남으로써 폭넓고도 줏대있는 중도세력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컨대 민주주의문제에서는 분단체제가 남한의 독자적 민주화에 부과하는 한계를 인정하고 남북화해의 진전과 결부된 현실적인 개혁노선에 합의하며, 민생문제에서도 자본주의 세계체제 및 그 하위범주로서의 분단체제가 떠안은 조건을 일단 수용함으로써 세계시장으로 열린 한반도경제권의 건설과 남한경제의 발전을 도모할 새로운 종합적 설계를 짜야 합니다. 이는 남북관계의 발전 역시 합리적 보수와 성찰적 진보가 동의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진다는 뜻이 되겠지요. 물론 이런 중도세력 사이에도 견해차와 갈등이 있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큰 틀에 동의하는 세력 내부의 생산적인 갈등이요 차이로 작용할 것입니다.
저는 한반도의 통일이 20세기 후반 그 어느 분단국과도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가운데 평범한 시민들의 참여가 한결 두드러지는 ‘시민참여형’으로 진행되리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아니, 통일의 개념 자체가 달라지는 만큼 한반도식 통일은 이미 진행중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상황에서는 이런 저의 주장이 허황된 낙관론으로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분단체제의 온갖 퇴행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분단체제의 흔들림이 더욱 심해지는 말기현상이지, 분단체제가 안정을 되찾는 사태와는 거리가 멉니다. 물론 파국의 위험은 엄존하지요. 그러나 그럴수록 평상심을 갖고 분단현실을 성찰하며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 아마도 오늘의 시련은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남북연합의 건설을 향한 마지막 고비가 될 것입니다.
제11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 기념 강연 원고
(2009.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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