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 시골 쥐와 도시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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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5-18 10:13 조회20,9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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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만난 한 지인은 요즘 세상이 어리둥절하다고 했다. 자산시장은 다시 들썩인다는데,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자신의 사업은 좋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좌절감과 두려움이 크고, 그러니 모두 접고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고도 했다.
위기에 되살아난 '농촌 동경'
그래서 널리 알려진 이솝 우화를 새삼 꺼내 보았다. 시골 쥐가 도시에 가니 먹을 것은 많았지만 너무 사람이 많고 위험한 것에 놀라 도시 쥐에게 말했다. "나는 시골에서 마음 편하게 두 발 뻗고 살 거야. 하지만 너는 언제 쥐덫에 걸릴지, 고양이한테 잡혀 먹힐지 알 수 없지 않아? 그리고 여기서는 아무도 너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구나."
그렇지만 위험한 호화 생활보다 검소하지만 마음 편한 생활이 윗길이라는 교훈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이가 많을 것 같지는 않다. '촌스러움'을 도무지 견딜 수 없어 하는 세태는 논외로 하더라도,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 쥐'로 변신하는 것이 꼭 좋은 해결책이라고 볼 수도 없다. 너무도 숨가쁘게 농촌에서 도시로 달려왔지만,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는 문명의 전환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부한 '시골 쥐' 이야기의 뒤에는 깊숙한 역사의 흔적이 있다. 무엇보다 이솝 자신이 우아한 설교자는 아니었다. 말더듬이에 얼굴은 추악했으며 몸은 허약한 기형이었다. 이숍은 노예 신분으로 옛 트로이 근처에서 태어나 아테네에 잡혀갔다가 사모스에 팔려갔다. 명석한 지혜로 노예에서 해방되었고 바빌로니아 왕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이솝 이야기는 그가 살았던 세계, 고대 그리스 도시들의 노예제 생산양식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노예제는 노동을 철저하게 도시적으로 상품화하는 세계였다. 그리스 고대 도시들의 시민단은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누렸으나,
그 것은 완벽하게 자유를 상실한 노예 상태의 농업노동과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육체노동자의 대다수는 노예이거나 외래인이었다. 아마 이들이 '도시 쥐'였을 것인데, 이들은 끊임없는 전쟁과 약탈, 공납과 식민의 산물이었다.
이솝이 말한 '시골 쥐'는 공동체적 생산이 지배적이고 사적소유는 도입되지 않았던 '원시인'들의 세계에서 살았을 것이다. 이 때 공동체는 경작지를 정기적으로 재분배하여 부의 불평등을 예방했으며, 농민은 공동체의 법정 아닌 사적 재판권에 예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불안과 무정부 상태에서 공동체는 와해되고 농촌 대중은 가혹한 봉건적 권력에 흡수되고 말았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근대 사회는 고대 세계를 새로운 형태로 재현한 것이다. 근대로 오면서 농촌지역에서의 자급자족과 위계 질서를 결정적으로 뒤흔든 것은 시장의 힘이었다. 농촌에 상품교환이 침투하면서 농촌 촌락의 권력관계는 도시적 질서로 대체되었다. 사람을 물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제한되었지만, 로마법의 '절대적 소유권' 개념은 시대를 뛰어 넘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도시의 삶이 농촌을 다시 지배하면서, 도시의 패배자들은 다시 농촌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시골 쥐'에 공감하는 것은 평화와 안정에 대한 갈구에서다. 혹시 농촌의 공동체적 삶이 경쟁의 위험과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중은 위기에 닥치면 과거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흘러간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도시와 농촌 잇는 '지역' 모델
불안한 도시의 삶이 미래의 희망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낙후된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도시와 농촌을 혼합하는 것이다. 그 것은 도시를 포함한 농촌, 농촌으로 연결된 도시라는 공간이다. 도시적 교환과 농촌적 위계가 결합된 조직 모델이다. 이는 스스로 세계와 연결되고 자생력을 지닐 수 있는 규모를 갖추어야 한다. 농촌과 도시를 넘어선 새로운 모델, 나는 이를 '지역'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이일영 한신대 사회과학대 교수
(한국일보. 2009.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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