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엽] 사탐, 미친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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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5-19 23:14 조회20,9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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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생들에게 과제를 내면 많은 학생들이 인터넷의 여러 자료들을 ‘복사하고 붙여서’ 리포트를 만든다. 그런 리포트라고 하더라도 주제에 맞게 잘 편집된 것이라면 좋은 점수를 주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고, 복사된 것들끼리 이가 맞지 않아 어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 정책에서도 이런 경우가 제법 있다. 관료들은 선진국의 제도를 복사해서 붙이길 좋아하지만 그렇게 한 것이 우리 맥락과 따로 놀고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학수학능력시험과 제7차 교육과정의 조합일 것이다. 전자는 미국의 에스에이티(SAT)를, 후자는 영국의 국가교육과정을 상당 부분 복사해 온 것인데, 둘의 조합이 기형적인 결과를 낳았다.
7차 교육과정과 수능시험이 결합효과를 뚜렷이 드러낸 것은 2005년 수능부터인데, 그때부터 수능시험의 과목 구조는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겉보기에 수능은 6개 영역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선택교과로 구성되는 사회탐구, 과학탐구, 직업탐구, 그리고 제2외국어 영역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이 네 영역의 과목 수는 무려 44개나 된다.
그렇게 된 이유는 7차 교육과정에 따라 고교 교과과정이 1학년까지의 국민공통 기초교육과정과 2, 3학년의 선택교육과정으로 나뉘고, 수능은 선택교육과정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선택교과과정은 대학에 진학해서 전공하려는 분야와 연계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실제로 그렇게 운영되기보다는 여러가지 문제만 야기한다.
우선 고교생들의 수업 선택 폭이 넓어진 것 같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대부분의 고등학교는 그렇게 다양한 교과목을 개설할 수 없기 때문에 학생들은 교과과정상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개설한 것 가운데서 선택할 뿐이며, 그 선택조차 대개 적성이 아니라 입시 전략에 따라 한다.
그래도 전체 고등학생들의 선택 폭은 넓어진 셈이지만, 그들이 진학한 대학에서 보자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알 수가 없는 학생들이 들어오게 된다. 내가 가르치는 사회학과 학생들이 공부한 사탐을 예로 들면 이렇다. 어떤 학생은 세계사는 공부했지만 한국근현대사는 공부하지 않았고, 어떤 학생은 그 반대다. 그래서 프랑스대혁명이 몇 년에 발생했는지 알지만 한국전쟁이 몇 년에 발생했는지 모르는 학생과 그 반대인 학생이 함께 신입생으로 들어온다. 교수들에게는 학제간 연구를 권하는 사회가 고등학생들에게는 좁게 칸막이 쳐진 지식을 편향적으로 학습할 것을 권하는 셈이다.
선택교과와 대학 전공 사이의 연계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많다. 예컨대 사탐 교과는 법과 사회, 정치, 경제, 사회문화, 국사, 한국근현대사, 세계사, 한국지리, 세계지리, 경제지리, 윤리로 구성되는데, 금세 의문이 생긴다. 왜 지리학은 그렇게 잘게 쪼개져 있고, 왜 심리학이나 신문방송학은 없을까?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사범대의 사회교육과가 법, 정치, 경제, 사회문화를 손에 쥐자 역사교육과와 지리교육과가 그만큼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관련 과목을 셋 만들어 챙기고 거기에 윤리교육과가 한 과목을 차지해서 사탐 과목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 말고는 별로 없어 보인다. 중등 교과과정이 일반 학부 교수들의 무관심 속에서 사범대 교수들과 역시 사대 출신이 많은 교과부 관료의 전유물이 됨으로써, 그토록 대학입시가 중요한 나라에서 그 시험제도가 현대 학문체계와 동떨어지고 중핵 교과과정을 형성하지도 못한 채 기형적으로 잘게 쪼개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청소년들 말투를 빌리면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사탐, 미친 거 아냐?”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09.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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