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식] 나비의 고민 ; 중국뮤지컬 『디에』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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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4-15 13:54 조회21,20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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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말, 중국의 대형뮤지컬 『디에(蝶)』를 관람했다. 솔직히 뮤지컬이라는 걸 보러 극장에 간 게 처음이다. 뮤지컬 붐에 짐짓 담담했던 오랜 습관을 깨고 나선 데는 ‘이젠 중국마저’라는 약간의 당혹감과 그로 말미암은 호기심 덕이거니와,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臺)의 비극적 로맨스를 제대로 맛보고 싶다는 은근한 기대가 더 컸다면 컸다. 천극(川劇)과 월극(越劇)의 대표적 레퍼토리로서 최근까지도 영화와 드라마로 리메이크될 정도로 ‘양축’은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연애담의 하나다.
왜 중국인들은 ‘양축’을 좋아하는가? 잠깐 그 줄거리를 따라가 보자. 명문가의 아름다운 아가씨 축영대는 남자에게만 허락되는 항주(杭州)의 학숙(學塾)에 다니기 위해 남장하고 입학한다. 그곳에서 가난한 서생 양산백과 우정을 나눈다. 그녀가 중도에 학숙을 떠난 뒤 그는 축영대가 여자임을 알게 된다. 양산백과 축영대는 사랑에 빠진다. 한편 동문수학하던 마원재도 축영대에게 청혼한다. 그녀의 부모는 가난한 양산백 대신 부귀자제 마원재를 사위로 선택한다. 양산백은 고통 속에 죽는다. 시집가는 날 그녀는 그의 무덤 앞을 지난다. 그녀가 수레에서 내려 무덤으로 다가가자 갑작이 무덤이 열린다. 축영대가 무덤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무덤이 닫힌다. 잠시 후 나비 두 마리가 무덤 밖으로 날아 오른다. 이 연애담을 흔히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하지만, 혼사장애에 저항하는 양상은 유사하다 할지라도 그 성격은 판이하다. 두 명가(名家)의 갈등에 기초한 혼사장애를 그린 것이 후자라면, 전자는 빈부의 격차라는 계급모순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양산백과 축영대의 결혼을 가로막은 계급적 차별에 죽음으로 저항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완성하는 이 비극은 놀랄 만큼 근대적이다. 천민 춘향이가 경화자제(京華子弟) 이몽룡의 사랑을 얻어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마침내 최고의 귀부인으로 상승하는 신데렐라 이야기로 작위한 한국과 달리 ‘양축’설화는 낭만적 환상 대신 소설적 진실에 직핍한다. 죽음을 통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된 두 영혼이 향수하는 자유의 표상이 바로 나비가 아닌가. 물론 육체의 상실을 댓가로 획득된 영혼만의 자유이기 때문에 그 자유는 덧없는 것이거니와, 그럼에도 나비의 애수 띤 팔랑임 또한 모순의 압도적 현존을 강력하게 환기하는 제한된 물질성을 확보하는 것임에랴.
그날 따라 차가 더 막혀 관람을 포기하려던 차, 뮤지컬은 개막 이후에도 입장이 가능하다는 안내로 우리의 지각관람이 아슬아슬 이루어졌다. 과연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 거의 만원이다. 뮤지컬 애호층의 두터움을 새삼 실감하며 어느 틈에 무대의 화려함 속으로 이동했다. 나에겐 무명이지만 팬들에게는 유명짜한 서양의 고수(高手)들이 중국의 정예들과 합작하여 만들어낸 이 뮤지컬은 나비처럼 고혹적인 죽음의 음악을 울렸다.
그런데 그 서사는 조밀하지 않다. 이 아름다운 ‘양축’을 『디에』는 어떻게 변형했는가? 량 샨보(양산백)와 주 잉타이(축영대) 모두 나비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나비인간이다. 이처럼 진화의 중간에 주저앉은 나비인간이 숨어사는 ‘세상의 끝’, 이 외딴 곳의 족장은 딸 주 잉타이를 인간과 결혼시켜 나비인간 전체가 인간으로 진화하는 대담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이 기획은 방랑시인 량 샨보의 등장으로 좌절한다. 량과 주의 연애, 도주, 추적, 체포, 량을 화형하는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간 주, 그리고 나비로 환생한 량과 주. 도대체 이 뮤지컬은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인가? 나비인간이 은거하는 <세상의 끝>은 어디이고, 인간이 되고 싶은 나비인간은 누구인가? 아무래도 개혁개방 이후, 중국과 중국인을 우의하는 것 같다. 오랜 모욕과 낙후를 뚫고 이제 대국의 위엄을 회복하고자 하는 중국인의 꿈이 이 뮤지컬에 자욱하다. 그런데 한편 ‘세상의 끝’에 웅크린 나비인간들을 인간으로 들어올리려는 족장의 체제는 집단주의 위에 구축된 일종의 독재다. 이 체제에 량과 주가 저항한다. 체제는 량을 처벌한다. 그런데 주가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면서 사랑은 승리하고 체제는 붕괴된다. 인간이 되려던 나비인간들의 꿈을 이탈해 량과 주가 도리여 나비로 날아가는 대단원은 과연 진화인가, 퇴화인가? 환생한 나비가 ‘세상의 끝’을 지배하는 집단주의의 해체를 상징한다면 진화지만, 그저 서양 개인주의의 찬미에 지나지 않는다면 퇴화일 수도 있다. 중국과 서양의 합작이 가져온 이 기묘한 분열이야말로 현 중국문화의 고민을 일각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고전을 재창조하는 작업은 어렵다. 특히 그것이 탁월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재창조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그 작업 없이 새로운 세상의 창조도 난망이라는 점에서 『디에』의 실험이 앞으로 더욱 진화하길 바라는 마음 그지없다.
최원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
(서남통신. 2009.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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