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욱] 한국의 위임대통령제와 지역/인물 정당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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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8-05 22:50 조회33,9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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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다수제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인 정당정치의 후진성은 국회의원 선거제도뿐만 아니라 위임대통령제와도 긴밀히 연결돼있는 고질적 현상이다. 위임대통령제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이 정당의 제도화 또는 구조화를 억제하고, 다시 그 전근대적인 인물/지역 중심의 정당구도가 위임대통령제의 문제 발생을 방조하거나 부추기고 있다. 권력구조와 정당구도 간에 일종의 악순환 관계가 형성돼있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한국의 위임대통령제 문제를 5가지로 분류하여 하나씩 짚어보도록 한다.
제어가 어려운 막강 권력
한국의 대통령은 가히 제왕적이라고 할 만큼 과도한 권한을 쥐고 있다. 국민으로부터 직접 '전권'을 위임 받은 '대권'의 단독 소유자라고 하는 (스스로의) 인식이나 (타인의) 평가가 충분히 가능한 정도이다. 특히 국회의 과반수 의석이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 즉 여당에 의해 점유되었을 경우, 대통령은 행정부는 물론 입법부와 사법부까지 사실상의 자기 통제 하에 둘 수 있다. 이러한 권력 집중이 정당과 의회정치를 무시하는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치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아래 네 번째 항에서 상술하겠지만,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 정당의 제도화 더 정확히는 정당의 구조화 미흡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한다. 만약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분명한 이념이나 정책기조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영속성 있는 정당이라고 한다면, 그 정당은 당원인 대통령에 대하여 (다른 건 몰라도) 이념적 혹은 정책적 구속력은 반드시 행사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책임정치의 근본 주체는 결국 정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대통령은 가장 기본적인 이 정당 구속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정당의 구조화를 이루지 못한 한국은 불행히도 바로 이 경우에 속한다. 대통령이 자기 정당도 무시할 수 있는 형국에 타당인 야당(들)을 제대로 존중할 리 없고, 그러한 정당들이 펼치는 의회정치에 민감할 까닭도 별로 없다.
대통령제 자체가 항상 이러한 정도의 권력집중 문제를 낳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제의 원조국가인 미국만하더라도 대통령 권력에 대한 견제 기제는 상당히 발달해 있다. 양당제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정당의 구조화가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상하 양원제 및 연방제 등도 유의미한 견제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잘 알려진 것은 바로 삼권분립 제도이다. 사법부의 독립성이 보장돼있음은 물론 의회의 독자적 위상도 확립돼있다. 우리에겐 이렇게 발달한 견제 기제가 전혀 없다. 따라서 대통령의 독선과 독주의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이 열려진 독선과 독주의 공간에서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종종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들의 반대세력은 물론 일반 국민과 심지어는 지지세력의 선호와 요구까지도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다. 시쳇말로 "우회전 깜빡이 키고 좌회전"한다거나 "좌회전 깜빡이 키고 우회전"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대표적 예는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한 한미 FTA라 할 수 있다. 상당 수준의 경제통합에 해당하는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를 국내대책도 별로 없이 (당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주도 국가인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급속도로 체결하겠다는 것은 명백히 자신의 지지세력의 선호와 어긋나는 것이었다. 더구나 '참여정부'에게 참여민주주의의 확대 노력을 기대하고 요구했던 지지세력과 일반 국민을 정책결정과정에서 철저히 배제한 것도 매우 실망스런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는 정당이나 의회정치의 역할도 거의 없었다. 관료들도 극히 일부만이 참여한 폐쇄적 정책결정이었다. 권위주의 시기의 기술 관료적 정책결정 행태를 연상시켰을 뿐이었다.(주1) 이 같은 독선과 독주 양상은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이나 미디어법의 강행 처리 사례가 보여주듯 현 이명박 정부에서 더 노골적이고 담대하게 펼쳐지고 있다.
승자독식-패자전몰의 사투인 대권 경쟁
위임대통령제는 지역할거주의와 금권정치를 부추기는 심각한 문제 또한 갖고 있다. 절대적으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을 선출하는 소위 '대선'은 단순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이 아니라 최고/최대 권력자를 배출하는 처절한 투쟁과정"이 된다.(주2) 승자독식, 그것도 그야말로 '대권'의 독식이므로 대통령 후보들과 그 소속정당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권력 쟁탈전에서 사투를 벌이게 된다. 이때 지역할거주의의 갈등과 충돌양상은 더욱 첨예해진다. 지역정당에 다름 아닌 각 후보진영에게 있어 기왕에 존재하는 지역감정은 그 자체 매우 중요한 정치자원이며 대선시 이의 활용은 극에 달하기 때문이다.
금권도 동원 가능한 최대치가 행사된다. 정치자금법을 수차례 개정하는 등 민주화 이후 금권정치의 시정을 위한 노력이 상당 정도 기울여져왔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워낙 큰 판의 제로 섬 게임이 벌어지는 것이므로 대선 과정에서의 금권 개입은 규제법률 정도로 해소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 역시 사실이다. 소위 '될 만한' 대통령 후보들에 대한 대기업 등의 정치자금 제공은 여전한 일이며, 이것이 결국 임기 중의 금권부패정치로 연결될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앞서 우리는 한국 선거정치에서 그 중요성이 명백한 지역주의 및 금권 변수가 지역기반이 취약하고 자금동원력이 부족하기 마련인 이념이나 정책에 기초한 신생 개혁 정당들에게 대하여 일종의 (정치시장의) 진입장벽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위임대통령제라는 한국의 권력구조는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못지않게 그러한 진입장벽을 더욱 높이거나 고착화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위임대통령제는 정당의 구조화 작업을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념과 정책을 뛰어넘는 정치적 구심력
위임대통령제는 간접적으로 신생 개혁 정당들의 부상을 어렵게 할 뿐더러 직접적으로는 기존 정당들이 인물 및 지역 정당의 한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이념이나 정책중심 정당으로 발전해 가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기본적으로 대통령직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권력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직이 갖고 있는 "정치적 구심력은 이념과 정책을 초월할 만큼 강력"하다.(주3) 따라서 정당과 그 구성원들은 대통령이 될 만한 명망가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정당의 정체성은 정책이나 이념보다는 당연히 그 중심인물로부터 찾아져야만 했다. 말하자면 정당들은 선거 이전에는 대선을 치르기 위한 대통령의 사조직처럼, 그리고 당선된 후에는 대통령의 통치도구적 집단과 같은 기능을 주로 수행해왔고, 대통령은 그러한 정당들 위에 군림하여 언론 등을 매개로 대중과 직접 대화하는 반정당적이고 반의회적인 포퓰리스트 행태를 보여 왔던 것이다.
특히 집권당의 경우 소속의원들이 자당이 표방하는 가치나 이념 혹은 정책 기조를 바로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의 뜻에 반하거나 어긋나는 의정활동을 펼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주4) 이는 대통령은 공식적인 당 총재이든 아니든 언제나 여당과 그 의원들의 실질적 지도자이며, 따라서 여당 의원들은 (입법부의 구성원으로서 행정부를 견제하기 보다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의 국정 운영을 지원하는 것이 주 임무라는 현실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당의 이념과 정책 확립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김심'이든 '노심'이든 대통령의 뜻과 의도를 잘 파악하고 따르는 것이 여당 의원이 마땅히 취할 바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지도자 중심의 정당 운영 행태는 '대통령감'을 모시고 있는 야당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정당들이 이념과 정책 차원의 자생적 정치기반을 확보할 여지는 적었고, 따라서 한국의 정당체계가 구조화를 이루기는 애당초 어려운 일이었다.
민주적 책임성의 한계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표-책임의 원리에 기초하여 작동한다. 국민의 대표자 혹은 대표세력은 선거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물게 돼있다. 대표 직무를 잘 수행했으면 재선 혹은 재집권할 것이고 그렇지 못했으면 낙선 혹은 실권할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개인에 대해서는 (무한 연임제가 아닌 한) 이 책임성을 따지기가 어렵다. 단임제든 중임제든 그의 마지막 임기의 업무수행에 대해서는 선거를 통한 책임 묻기라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대통령 소속 정당에 대하여 책임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전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같은 당 소속의 후임 대통령 후보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는 소위 '회고적 투표'(retrospective voting)가 가동되도록 하는 일이다.(주5) 결국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통령의 책임성은 기본적으로 정당이 담보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당을 통한 민주적 책임성의 확보는 정당의 구조화가 전제돼야 가능한 일이다. 한국에서처럼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집권당과 야당이 새로이 만들어지곤 한다면 책임을 물을 대상이 애매해진다. 정책이나 이념적 정체성이 (최소한 구분 가능할 정도로) 분명하고 그에 더하여 안정성과 연속성을 갖춘 정당들이 포진돼있어야 회고적 투표 기제가 제대로 가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한국의 경우 대통령의 책임성은 명백한 한계를 안고 있다.
사실 집권당이 확실한 정책기조와 이념으로 승부하는 소위 제도적 지속성을 갖춘 '족보 있는' 정당이라면, 대통령의 임기 중에 이미 그의 직무수행에 대하여 당 자체가 상당한 책임의식을 지고 개입하고 견제하려 들 것이다. 예컨대, 대통령이 자당의 이념 및 정책기조에서 벗어나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려 할 경우 당은 최선을 다해 그것을 막고자 할 것이다. 대통령은 임기 후 물러난다 할지라도 정당은 무한히 계속되는 선거정치에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대통령의 정책적 일관성 및 수행능력 등을 그가 속한 정당이 국민에 대하여 책임지는 구조가 된다. 말하자면 대통령의 정책은 자기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정당의 정책'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계구조, 즉 대통령은 자신이 속한 정당에 대해 책임지고 그 정당은 다시 국민에 대해 책임지는 구조가 되어 있으면 대통령의 가변성이나 예측 불가능성은 정당에 의해 상당히 제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대통령의 독선과 독주는 견제하기 어렵고 민주적 책임정치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한국 대통령의 책임성과 관련해서는 애초 대통령 후보에 대한 검증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한다. 주지하듯,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소위 "바람의 효과"가 매우 크다.(주6) 이 포퓰리즘적인 분위기로 인해 후보에 대한 충분한 검증 과정 없이 대통령이 결정되곤 하였다. 이 역시 정당의 구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이다. 족보 있는 정당은 여간해선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후보에 대한 이념과 정책 성향 검증은 철저하다. 더구나 그 검증 과정은 정당의 리더십 위계 구조를 통해 장기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를 갖추지 못한 한국 정당들의 후보 선출 과정은 여론시장에서 급조되곤 하는 후보 개인의 인기나 이미지에 좌우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정당의 "변방"이나 외부에 머물러 있던 "아웃사이더"가 종종 후보로 부상하곤 하는 이유이다.(주7) 이 같은 일이 잦을 경우 대선은 결국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전 국민의 정치 도박과 다름없다. 거기서 대통령의 책임성을 따지기란 사실상 궁색한 일이다.
이원적 정통성의 문제: 의회 vs 대통령
대통령과 의회는 모두 국민들로부터 선거를 통해 직접적으로 정통성을 부여받은 기구이다. 따라서 이 두 기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할 경우 어느 쪽의 입장이 더 정통성이 있는 것인지를 가리기는 쉽지 않다. 바로 '이원적 정통성'(dual legitimacy)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특히 여당이 의회 내 소수파이고 야당이 다수파가 되는 '여소야대,' 즉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 상황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경우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부는 야당이 지배하는 입법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정책수행능력에 상당한 손상을 입기 마련이다. 정국은 교착과 파행으로 치달을 수 있다. 대통령이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 내용이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해도 분점정부 하에서의 통치력 약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대통령은 그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심한 경우 다수당인 야당의 주도로 의회에서 제정된 법률 집행을 대통령이 책임져야하는 부당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 분점정부 상황은 한국과 같은 다정당체계에서는 가끔 혹은 빈번히 일어나는 현상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상태'(normal state)에 가깝다. 그래서 다정당체계와 대통령제의 만남은 제도적 부조화 문제를 상시적으로 일으키는 "곤란한 결합(difficult combination)"이라고 평하는 것이다.(주8) 이것은 반드시 이원적 정통성 때문만이 아니라, 다정당체계 하에서는 대통령이 '정당권력(partisan power)'을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주9) 대통령의 정당권력이란 행정부가 국정을 원활히 수행함에 있어 필요한 정당(들)의 지지를 안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집권 여당이 의회의 다수당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경우에는 대통령이 원하는 정책안이 성공적으로 법제화될 가능성은 당연히 높다. 대통령이 다수당인 여당을 통해 정당권력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정당체계에서는 어느 한 정당이 의회의 과반수 의석을 안정적으로 차지하고 있기는 쉽지 않다. 의석이 다수 정당에 의해 나눠지기 때문이다. 여당이라고 예외인 것은 아니다. 결국 소수파 여당과 다수파 야당연합이 의회 구성의 일반적 형태가 되고, 따라서 분점정부 상황 역시 일반적이 된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정당정치는 지역할거주의에 기인한 바 큰 다정당체계로 줄곧 이루어져왔다. 지역에 기초한 다수 정당들 간의 경쟁 상태가 지속돼왔기 때문이다. 분점정부가 계속 생겨났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노태우 정부 때에는 3당 합당, 김영삼 정부에서는 타당 의원의 영입, 김대중 정부 당시에는 'DJP공조'라는 일종의 정당연합, 그리고 노무현 정부 하에서는 '대연정' 등과 같은 인위적인 정계개편들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주지하듯 그것들은 모두 미봉책에 불과했고 오히려 정당간 반목과 대립의 심화, 국민들의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불신 확산, 의회정치의 위상 추락 같은 심각한 후유증만 남기곤 하였다. 사실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대통령권력의 속성상 대통령제하에서의 합당, 연합, 연정 등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은 구조적으로 낮은 것이었다.(주10) 결국, 다정당체계와 대통령제 결합의 곤란함을 당장 극복하고자 추진됐던 무리한 시도들은 장기적으로는 정치적 파행과 부작용만 양산했을 뿐, 정부의 체제 수행능력을 근본적으로 제고시키는 데에는 모두 실패했다.(주11) 이 같은 사실은 한국의 다정당체계에서 대통령제의 효율적 운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한국의 대통령제가 안고 있는 여러 심각한 문제점들을 짚어보았다. 지역/인물 정당구도와 맞물려 이렇게 많은 정치적 어려움과 문제를 낳고 있는 한국의 위임대통령제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당연히 드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현재 학계와 정계 등에서는 대통령 중임제, 분권형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등의 도입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방향으로의 권력구조 개혁이 한국의 합의제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를 중심 주제로 하여 제<6>편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프레시안. 2009.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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