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언니에게 업혀서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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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8-01 17:25 조회4,86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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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쇼핑사이트들에서 포대기가 인기라는 기사를 읽었다. 이름도 한국어 발음 그대로 ‘코리아 포대기’라고 불린단다. 칭얼대던 아이를 포대기에 감싸 업으면 잠도 잘 들고 신체적 교감도 잘돼 좋아한다는 것이다. 정말 인기가 있는지 그냥 가십성 기사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몸의 밀착이 주는 따스함은 국적 무관 보편적 느낌일 것이다. 등센서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엄마 등에 업힌 기억은 가물가물해도 그 느낌만큼은 원체험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내게는 “내가 너희 삼형제를 업어 키웠다”며 유세를 떠는 세명의 이모도 있다. 막내이모는 맏이인 어머니하고 한참 터울이 져서 나하고 일곱살 차이밖에 안 난다. 고작 열살 언저리 여자아이가 날 업어 키웠다는 말이렷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면, “아이고, 야 보래이, 키와봐야 아무 소용 없대이” 하며 깔깔 웃곤 하는 것이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화가 박수근의 작품 중에는 단발머리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은 소녀가 아이를 업고 있는 그림이 여럿 있다. 한국전쟁 뒤 고단한 삶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이다. 이철수 화백의 판화 속 ‘몽실언니’도 저 모습이다. 새엄마 죽고 몽실언니가 이복동생 난남이를 업어 키우기 시작한 게 열살 무렵이었다. 빈곤을 정직하게 응시한 사진작가 최민식의 작품 중에도 1950~60년대의 아이 업은 소녀가 여럿 등장한다. 대개 열살 남짓, 어리고 어리다. 흑백사진 속 아이 업은 소녀들이 시대를 건너 나를 보고 있다.
업어 키우는 건 한국의 오랜 문화지만, 여자아이가 동생을 업어 키우는 풍습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다산해도 그만큼 많이 죽던 전통시대에 큰딸이 동생을 키울 일은 별로 없었다. 여성은 밭농사를 빼면 경제활동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으니, 역시 딸에게 육아를 맡길 이유가 없었다. 사정이 바뀐 건 일제강점기, 1930년대부터였다. 다산은 여전한데 근대의료의 보급으로 영유아사망률이 낮아지면서 아이가 늘었다. 20세기 전반 인구급증은 세계적 현상이었다. 우리 부모세대가 많으면 7, 8남매 속에서 자란 연유다. 그 와중에 일제는 여성 노동력을 최대한 짜내려 했다. 총독부는 조선 농촌이 빈곤한 원인을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이 아니라 조선인의 민족성에서 찾았다. “부인이 야외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 삼았다. 1930년대에 농촌진흥운동을 추진하면서, 온 가족이 일해야 한다며 ‘전가노동’ 정책을 밀어붙였다. 여성은 가사, 육아, 밭농사에다 논농사와 부업까지 떠맡아야 했다. 탈진한 엄마 대신 큰딸이 동생들을 업어 키우게 된 까닭이다.
왜 아들은 아니었을까? 이 시기쯤이면 남자아이는 웬만하면 초등학교에 취학했다. 여자아이는 못 가거나 다니다가도 그만뒀다.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1940년께 도시 남아 열에 아홉이 초등학교에 갔다. 농촌 여아는 그 비율이 열에 한명이 못 됐다. 평균이 무의미한 사례다. 이렇게 ‘언니’는 동생들을 키우고 밥하고 청소하며 자랐다.
지난 5월 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연세대 사학과 이기훈 교수가 발표한 ‘언니의 곡절’의 대강이다. ‘어린이와 한국의 근현대―이미지와 담론, 현실’이라는 주제 아래 여러 발표가 진행됐다. 토론을 맡은 나는 1960년대까지를 다룬 이기훈 교수의 연구를 공부하면서 저 어린 언니들이 1970년대 이후에 살았을 삶이 궁금해졌다.
적지 않은 언니들이 십대에 집을 떠나 도시로 식모살이를 갔다. 주인집 잘 만나 학교 다닌 이도 있지만, 남의 집 드난살이만도 못한 경우도 다반사였다. 십대 말이나 이십대가 되면 언니는 여공이 되고 버스 차장이 됐다. 적은 월급이나마 떼어서 고향에 부쳤다. 그 돈으로 동생들이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생도 되고 했다. ‘미싱 타는 여자’가 되면서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이도 생겼다. 1979년 8월,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와이에이치(YH)무역의 여공 김경숙이 그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식모 생활을 시작했다가 도둑으로 몰려 쫓겨났다. 열다섯에 상경해 봉제공장의 시다로 일하다가 와이에이치무역에 취직했다. 회사가 위장폐업을 하자 싸움으로 맞섰다. 세살 아래 남동생이 대학 가는 걸 보는 게 그녀의 꿈이었다. 그 꿈 못 이룬 채 강제진압에 희생됐다. 그리고 유신독재의 종말을 앞당겼다.
봉제공장도 없어지고 버스 차장도 사라진 뒤 언니들은 어디로 갔을까? 실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지난 2월4일치 <경향신문> 기사 “어느 날 그들의 노동이 사라진다면”에 따르면 청소하고 돌보고 나르는 필수노동자의 67.4%가 여성이고, 돌봄 및 보건 서비스의 경우는 93.8%가 여성이다. 필수노동자의 4분의 1이 60살 이상 여성이고, 70살 이상도 10.2%에 이른다. 올해 초 교통사고를 당한 장모님을 돌보던 첫 간병인은 일흔일곱이었다. 우리는 아직도 그녀들의 등에 업혀 있다.
언니들은 ‘희생양’이었다. 가족의 생계가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큰딸의 학업을 중단시켰다. 아들보다 먼저 노동시장에 방출했고, 결혼도 최대한 늦췄다. 그렇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웠다. 정치사학자 김원은 이 단순한 희생양 담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에서 이 언니들이 욕망도 동경도 결여한 수동적 희생양이기만 했던 건 아니라고 반박한다. 한없이 젠더불평등하던 가족을 탈출하기 위해 서울로, 공장으로 떠난 주체적 존재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내 어머니는 1941년생, 경북의 시골에서 5남매의 맏딸로 태어났다. 동생들을 키우느라 6학년 때 초등학교를 그만뒀다. 줄곧 지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부모님이 “나이도 많고 근본도 모르겠다”며 개성 출신 서울 남자와의 혼인을 반대하자 주소 하나 들고 서울로 가출해서 살림을 차렸다. 지긋지긋한 노동에서 탈출하려면 그 방법뿐이었다고 회고하신다. 그 뒤로도 노동은 평생 이어졌지만 선택한 삶이었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예순이 넘어 중졸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해서 합격했는데, 초등학교 졸업 기록이 없어서 응시 절차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60대 후반에는 산업체 부설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가게를 하면서 다니기에 너무 힘들어서 결국 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영어도 수학도 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하셨다. 나도 기뻤다.
한국을 ‘선진국’으로 이끈 게 재벌인지 노동자인지 또 무슨 대통령인지 아닌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지곤 한다. 그 다툼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누가 위대했건 아니건 우리를 업었던 언니들 없이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현대사를 새로 써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도착한 선진국에서 어떤 언니들은 할매가 되어 아직도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업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언니들을 업을 차례다. 많이 늦었지만.
조형근 사회학자
한겨레 2022년 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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