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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인문학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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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9-28 17:13 조회4,4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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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어느 새 익숙한 말이 되었다. 진지해 보이려면 인문학 서적 몇 권쯤은 읽어야 할 것 같다. 언제나 인문학을 떠들면서, 인문학이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여긴다. 그러면서 정작 인문학이 무엇이며, 왜 인문학이라 부르는지 잘 모른다. 사전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정의한다. 조금 다르게 설명하면, 자연을 다루는 자연과학에 대응하여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학이 아니고 인문학인가? 인간을 중심으로 삼되 문자를 도구로 한 문학 또는 문예로 표현하는 방식에서 유래한다.


신학이 모든 것을 압도했던 중세 스콜라주의는 신 중심의 세계 구축을 위해 궤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한 경향에 반발하여 보다 우아하고 간결한 인간의 문장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예수 탄생 이전이나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을 전후하여 아직 기독교가 서양인의 시대적 삶을 가두기 전의 “고대인의 문체”로 돌아가자는 것이 인문주의였고, 더 나은 “인간의 글”을 의미하는 “litterae humaniores”의 번역어가 인문학이다. 19세기 독일 학자들이 가까운 과거를 거부하고 먼 고대 로마를 숭상하는 작가들을 인문주의자로 지칭한 예와 상통한다.




그러나 인문학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었다. 중세 서양인들이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 인간의 행복을 찾아 나섰을 때, 희망과 기쁨으로 당대를 찬양한 선구자는 종교적 사상가도 정치인도 시인도 아니었다. 지성을 갖춘 인문주의자들이었다. 지적 노력으로 고대의 지혜를 재발견하여 현재의 즐거움으로 바꾸었다.


읽는 이의 뇌가 컴퓨터였는데

이제는 인터넷에 위협당하고

앱을 통해 무한세계 만나



종이에 찍은 문자 영역 효용은

그래도 소멸하지 않을 것



혈기왕성하고 두되 회전이 빠른 젊은이들에게 라틴어 시를 외우게 하는 것이 아닌 지금의 인문학은 온갖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옛 인문학의 전통은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저수지에 무슨 사태가 발생하면 공무원들이 삽과 양동이를 들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문자로 채워진 보고서부터 작성하는 관행이 그렇다.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규범적 평가를 하며 결론을 설명하는 판결문도 그 범주에 든다. 어떤 상황에서든 맞는 논리를 골라 배치하고 수사학적 표현을 찾아 헤매는 변호사의 고민 역시 인문학적 정경이다.


생각이나 논리를 담은 짧은 글이든, 그것을 모아 전달하는 신문이나 책이든 애당초 인류에게는 메타버스였다. 글로 다른 현실을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장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가상의 공간을 넓혔다. 그 안에서 현실의 불만을 해소하고 오류를 수정했다. 전통적인 글읽기는 다양한 이야기를 내 머릿속에 집어 넣어 증폭시킨다. 읽는이의 뇌가 컴퓨터였다. 그런데 이제는 문자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위협당하고 있다. 정교한 반도체 기술과 황홀한 기계 장치가 꾸민 단말기 속에 나를 밀어 넣는다. 손바닥 크기만한 화면에서 손톱만한 앱을 통과하면 무한의 세계를 만난다.


법률신문의 존속 이유는 법조인이나 미래에 속한 법률가들에게 인문학적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SNS나 틱톡 역시 문자나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니 책이나 신문보다 훨씬 훌륭한 대체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신적 지위를 차지하더라도, 종이에 찍은 문자 영역의 효용이 소멸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와 구식은 폐기의 대상이 아니라 새것을 받아들이는 기준이 된다. 신문을 발간하는 일이 그 사실을 매번 입증하는 행위다.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공동 편집인)

법률신문 2022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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