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삶의 진실을 투명하게 노래한 프레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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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11-07 15:18 조회4,55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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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길 돌바닥 위에 어느새 아침 우유병 내려놓는 소리가/ 온 동네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면” 거리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까? 거기서 “가을은 겨울을 기다렸고/ 봄은 여름을 기다렸고/ 밤은 낮을 기다렸고/ 차茶는 우유를 기다렸고/ 사랑은 사랑을 기다렸고/ 나는 외로워서 울었지”(어느새 아침 우유병 내려놓는 소리가) 어쩐지 이런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뜨겁고 달고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러 나가야 할 것 같다.
자크 프레베르(1900~1977). 프랑스어로 ‘프레(pré)’는 초원이고 ‘베르(vert)’는 초록이니 초록빛 초원의 자크라는 예쁜 이름이다. 울창한 밀림처럼 비밀스러운 데가 없는 이름의 소유자라서 그런가, 그의 시는 복잡한 구석 없이 아름답다. 그는 환히 드러난 초원처럼 삶의 진실을 투명하게 그려냈다. 시를 쓰는 모습도 편안했다. 노천카페에 앉아 거리의 이웃들을 향해 말을 걸듯 장난스럽게 시를 썼다. 그 많은 시들 중 몇몇은 국민가수 이브 몽탕과 에디트 피아프가 부르는 샹송이 되었고, 그 노래들로 그는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 되었다.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는 "프레베르의 시는 그동안 시의 이름으로 정신을 경직되게 만들어온 모든 것에 대한 생생한 거부이자 조롱”이라고 썼다(석기시대에서 자크 프레베르까지). 하지만 프레베르는 정신을 경직시키는 문학을 아예 몰랐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리라. 그가 받은 문학 수업이라곤 초현실주의 그룹의 친구들에게 배운 것이 전부. 그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으니 빨리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초등교육 과정을 끝낸 다음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문학청년들에게는 일종의 성경이었던 로트레아몽, 블레이크, 랭보 같은 위대한 시인들의 시집도 초현실주의 그룹과 어울리게 되면서 겨우 읽었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기보다는 예술의 변두리를 서성거리는 불량배처럼 느꼈다. 모든 종류의 엘리트주의와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프레베르는 살아 있는 것을 사후 경직된 시체처럼 만드는 어떤 권위도 거부했고 집, 학교, 군대, 공장 어디에서든 권위에 짓눌린 사람들의 목소리로 말하길 좋아했다.
그는 머리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가슴으로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선생님에게는 아니라고 말한다
(……)
교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등생 아이들의 야유를 받으면서도
온갖 색깔의 분필을 들고
불행의 검은색 칠판 위에
행복의 얼굴을 그린다.
-열등생
프랑스의 초등학교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자주 읽히는 시라고 한다. 공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시다. 사실 그들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늘 열등생이다. 58등은 57등보다, 2등은 1등보다 공부를 못한다. 그런데 1등은 늘 1등을 빼앗길 가능성이 있으니 결국 모든 아이가 열등생이거나 잠재적 열등생이 되고 만다. 학교에서만 그런가. 순위를 매기는 곳에선 모두가 다 그렇다.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는 못난 자식, 회사에선 뒤처진 직원, 아이가 생기면 무능한 부모로 취급받을 위기에 처한다. 시인은 경쟁과 비교에 지쳐 죽고만 싶은 모든 아이와 어른을 위해 외친다. “당신들에게 맞는 색깔/ 삶의 색깔을 다시 입으세요”(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
프레베르는 억압, 권력, 전쟁을 싫어했지만, 사실 그가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사랑하는 이들을 통제하려는 지배의 욕망이었다. 그런 욕망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 바로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감옥 지키는 사람이여/ 피 묻은 열쇠를 들고 어디로 가는가/ 아직 때가 늦은 것이 아니라면/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풀어주겠네/ 내 욕망의 가장 은밀한 곳에/ 내 고통의 가장 깊은 곳에/ (…) / 어리석은 사랑의 맹세 속에/ 부드럽게 잔인하게/ 내가 가두었던 그 여자를”(감옥 지키는 사람의 노래) 그는 자신이 연인을 위해 준비한 것이 새와 꽃들 사이에 숨겨둔 “쇠사슬”은 아닌지, 연인을 “노예시장”에서 찾고 있는 건 아닌지 반문하며 자신 안의 끔찍한 욕망과 싸웠다(내 사랑 너를 위해).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게 만드는 그런 욕망 말이다.
프레베르는 1900년생이다. 100년도 훨씬 전에 출생한 그에게도 당연했던 사랑의 자유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니 다시 적어둔다. “사랑의 바람이 불어와/ 가을의 나뭇잎처럼/ 또 다른 사랑 쪽으로/ 언젠가 너를 실어간다 해도/ 아무도 너를 소유할 수 없고/ 아무도 너를 붙잡아둘 수 없지”(남자의 노래)
진은영 시인
한국일보 10월 28일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02613460002322?di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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