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삼중위기론’이라는 거대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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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03-06 17:57 조회3,42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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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상황이다. 지난해 4분기에 마이너스 성장의 충격적 소식이 가해졌음에도 정부나 정치권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정찰풍선 문제로 미·중 갈등은 다시 고조되었고, 북한은 연일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핵 개발 의지를 부인하면서 한·미 연합훈련으로 대응하고 있다. 안보체제·경제체제가 요동치는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혼란스럽다.
지금은 거대한 변동을 조망하는 거대담론이 필요한 전환기이다. 마침 중앙대 백승욱 교수는, ‘세계체계’ 관점에서 한국의 ‘삼중 위기’를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동향과 전망> 2023·2). 그는 한국이 자유주의 전환의 실패라는 위기 속에서 새로운 카오스에 말려들어가고 있다고 보고, 중도자유주의와 그를 넘어서는 사상적 좌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백 교수가 말하는 삼중 위기의 첫째는 한국자본주의의 축적구조와 통치체제, 지정학적 안정성의 위기이다. 이는 거시경제 지표를 보면서 경제의 어려움을 말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현재 위기는 세계체계 차원의 대변동에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근 세계체계 변동이 얄타체제의 해체를 의미한다는 것은 독보적·독창적 문제의식이다.
2차 대전 후 수립된 얄타체제는 미국·소련의 협조를 골격으로 하여 영국·프랑스 등 전승국이 참여하여 수립한 탈식민주의와 전쟁 억제의 체제이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강대국 간 전쟁 억제 합의의 구조가 깨졌다는 것이다. 얄타체제가 해체되면, 한국 자본주의 발전을 담보했던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조건이 무너진다. 현실의 변화는 안보상황이 경제정책을 제약하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경제안보의 틀에서 나아가 세계체계 차원의 국가 대전략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둘째 위기는 위기에 대해 분석하고 대처하지 못하는 정치의 위기를 말한다. 정치적 무능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여야는 보수 대 진보, 또는 반민주 대 민주의 구도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영남 지역주의 대 비자유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 위기는 위기 돌파를 위한 자기 성찰의 피드백이 되풀이될 수 있는 사상거점이 부재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체계 변동이 정치경제적 위기의 조건을 만들고 있는데, 한국에는 이를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는 정치적·사상적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삼중의 위기에 대한 인식·대응에서 자유주의 제도와 사상이 중요하다는 것이 삼중위기론의 핵심 논지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에 대해 기이하게 대응해 왔고, 이것이 정치적 무능의 위기, 사상사 부재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보수 우파의 자유주의 담론은 19세기 시장자유주의 또는 기득권 옹호에 그치고 있다. 좌파나 진보를 자처하는 대부분 세력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제도가 아니라 관념 속의 19세기 자유주의를 공격하고 관념적인 비자유주의 대안으로 쉽게 비약한다. 2차 대전 이후의 자유주의 제도와 사상에 대한 몰이해가 현실의 위기 대응과 자유주의 이후의 제도 구상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처한 삼중 위기가 세계체계 인식의 실패에서 온다는 점은 필요한 지적이다. 그리고 위기 돌파를 위해서는 세계체계의 핵심요소인 자유주의 제도와 사상에 진지하게 대면해야 한다는 것도 새겨둘 대목이다. 다만 자유주의를 통과해야만 이상적 대안을 논할 수 있는가는 좀 더 따져봐야 한다. 한국에서 왜 자유주의가 허약한지도, 왜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주의가 제기되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자유주의는 중요하다. 그런데 자유주의와 병립하면서 관념적 포퓰리즘과 구별되는 비자유주의 대안은 전혀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87년체제론에 대한 논의도 토론 거리가 많다. 백 교수는 87년체제론이 87년 이후 새로운 세력과 그 이전의 낡은 세력의 대립을 역사의 기본 축으로 설정하였다고 주장한다. 진보세력 안에 존재하는 적폐청산 사관에 대한 비판은 경청할 만하다. 그러나 87년체제론 역시 세계체계론과 연계하여 제기된 측면이 있다. 자본주의 세계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남북 간 적대구조를 분단체제론으로, 한국 내의 대립구조를 87년체제론으로 포착하려 한 것이다.
지금은 현실에 기반한 거대담론이 절실한 때이다. 총체적 인식이 있어야 대전략이 나온다. 북·중·러의 전략적 동맹을 방관하면, 한국은 일본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한다. 한국이 나름의 대전략을 수립하면, 세계체계 변동과 재편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를 만들 수 있다.
이일영 한신대 국제학부 교수
경향신문 2023년 2월 22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222030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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