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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촛불 든 여학생들의 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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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5-12 11:01 조회21,9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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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쇠고기가 전면 개방되자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청계천 광장에 모여들었다. 이 집회에 여학생이 인상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그러자 우파 언론,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입을 맞춘 듯이 여학생들에게 ‘배후’가 있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지난 수십 년 정적을 제거하고 이견을 제압하는 수단으로 ‘배후’라는 말을 애용해 온 분들이 이 말을 꺼내는 것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이런 분들께는 중요한 것은 ‘배후’가 진짜로 무엇이냐도 아니다. ‘배후’가 있다는 생각과 배후가 있다 ‘카더라’라는 소문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대신 그 배후가 정말로 무엇인지 찾아볼 필요가 있다.

문제가 된 것이 여학생들이니 이들의 세대적 특성에 주목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들은 대개 1990년대 이후에 출생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에 출생한 이들을 하나의 독특한 세대로 규정한 역사적 경험이 존재한다고 하기 어렵다. 중요한 사건으로 외환위기가 있지만, 그것은 이들이 실감하기엔 너무 어린 시절에 생긴 일이다. 내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부모가 누구냐는 것이다. 이들의 부모는 세칭 386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이 386이 아니라 386의 자녀가 처음 정치적 장면에 출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촛불 시위에 참여한 한 청소년은 인터뷰에서 20대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며 걱정까지 했다. 이 학생의 말에 나의 가설을 겹치면 세대적 분할선의 양상을 그릴 수 있다. 지금의 보수적인 20대의 부모는 40대 중반 이상, 대학을 다녔다면 70년대 학번, 50년대 생들이다. 386에 빗대면 475세대라고나 할까? 이들은 현재 한국의 주류인 동시에 보수적인 세대다. 그리고 이들의 자녀인 20대는 보수적이다. 이에 비해 386은 현실 속에서 많이 타협하고 좌절했다고 해도 이들보다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인 지금의 10대는 475세대의 자녀인 20대보다 진보적이다. ‘조직’이나 ‘조종세력’이 아니라 세대 교체가 변화된 양육 철학과 관행을 통해 격세적으로 한번 더 반복되는 것이다. 요컨대 조용히 진행되고 축적된 사회변화가 여학생의 배후인 셈이다.

하지만 왜 청소년 일반 혹은 학생이 아니라 여학생이 새로운 현상의 중심에 있는지를 설명하자면 좀더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관찰자의 착시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공적 장면에 남성이 출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성차별적 시선은 여학생의 출현을 의외로 받아들이고 그만큼 더 과대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착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쇠고기 같은 먹거리 문제가 그것에 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여학생을 더 많이 불러 모았을 가능성 또한 많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변화와 연대의 잠재력이 여학생에게 더 많이 축적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이 자녀 수 감소다. 자녀 수의 감소는 딸과 아들에게 두루 교육투자와 배려를 증대시켰다. 이로써 여학생들의 능력은 매우 크게 신장되어 학업 면에서도 남학생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지금 청소년 세대에서 남녀의 분할선은 공사의 분할선과 대략도 일치하지 않는다. 여학생들이 공적 장면에 진출하는 데서 지적·교양적 장벽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남학생들보다 훨씬 소통 지향적이다. 남학생들이 입시경쟁의 소외를 ‘게임’에 몰두하며 피시방을 전전하며 사사화되고 있을 때, 딸들은 교양과 소통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부모보다 더 맑은 눈과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부모들은 자신들의 정화되고 고양된 순수태인 자녀에게 놀라고 있는 것이다.


 

김종엽/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08.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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