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식] 새 동학(東學)의 길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2-02 11:29 조회21,236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아무래도 비상한 시대를 살고 있는 모양입니다. 소련의 붕괴를 목격한 일이 엊그제 같은데. 오늘은 미국의 쇠퇴를 알리는 결정적 징후에 우리 모두 노출되었습니다. 위기에 빠진 미국을 구할 잔다르끄로 등장한 오바마가 어떤 궤적을 그릴지 예의 주시할 바인데, 마침 지난 10월 30일 한겨레에 실린 미국 미래연구소 보로사지 소장의 인터뷰가 흥미롭습니다. 선거 전임에도 미국 대선이 진보의 시대를 열 것이라고 확언한 그는 “탈규제에서 규제, 일국주의보다는 다자주의, 전쟁보다는 외교로 바뀌고 있는 미국의 모델”을 참조해 한국의 진보진영도 대비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나는 그가 제시한 열쇠말들을 존중하면서도 한편 수정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탈규제와 규제는 역시 주체의 윤리적 감각을 불신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아니 근본적 대책이 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물론 인심의 위태함을 제어할 제도적 접근의 유효성을 승인하지만 마음의 깊은 움직임에 예민하지 못하면 만사가 헛것으로 돌아갔던 뼈아픈 경험들에 비추어 볼 때 역시 도덕이 핵심일 것입니다. 최근 김영호(金泳鎬)는 “시장의 자유와 정부의 규제라는 기존의 틀을 넘어서” ‘사회책임(SR)’을 새로운 열쇠말로 들어올립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을 정부와 사회가 평가하여 사회책임투자자금을 지원하는 제도를 통해 신자유주의로부터 사회책임자본주의로 가는 길을 모색하자는 주장입니다.(「글로벌 금융위기와 한국의 대응전략」) ‘사회책임’은 비단 기업에만 국한하지 말고 검토할 만하거니와 그때는 자기를 넘는 일조차 자기가 통제하는 ‘책임’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그렇다고 규제로 표현된 제도적 접근을 모두 방기하고 개인의 고독한 도덕적 결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으로 책임론이 오해되어서도 곤란합니다. 이 점에서 책임을 축으로 탈규제와 규제를 이울러 구사하는 방향에서 새 길을 모색하면 어떨지요. 전쟁과 외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수단 이외에 국경을 넘은 시민적 교류, 사카모토 요시카즈(坂本義和)의 용어를 빌면 ‘민제民際)’가 중요한 지위로 고려되어 마땅합니다. 민제를 축으로 전쟁과 외교가 회통한다면 비단에 꽃을 더한 격일 것입니다. 일국주의의 폐해는 이제 널리 알려진 터인데 다자주의 또한 일국주의와 제휴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한다면 이 또한 불충분합니다. 역시 우리에게는 일국주의와 다자주의를 동아시아를 축으로 만나게 하는 작업이 종요롭습니다.
최근 번역된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른바 보편주의가 강자의 보편주의 즉 파편적이고 왜곡된 유럽적 보편주의라는 점을 밝힌 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보편적 보편주의(universal universalism)를 제창합니다. 유럽적 보편주의를 넘어서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자발적 굴복으로 전락하기 쉬운 초특수주의(super-particularism)조차 동시에 극복함으로써 진정한 보편자의 모색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새삼 우리의 동아시아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동아시아론은 초특수주의인가? 역사적으로 돌이켜 보건대 대동아공영권론은 그 대표적 예의 하나일 것입니다. 유럽적 보편주의를 비판했지만 기실은 그 짝퉁에 지나지 않는 동아시아적 보편주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동아공영권론으로 표출된 조숙한 동아시아적 보편주의는 일본제국주의의 패배와 함께 한줌의 연기로 흩어졌는가?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동아시아의 흥기를 따라 신판 변종들의 망령이 처처에 배회합니다. 동아시아적 보편주의라는 유사 보편주의 또는 유럽적 보편주의의 짝퉁을 어떻게 넘어서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감히 자부컨대 저/우리는 두 유사 보편주의를 횡단하는 동아시아론을 추구해 왔습니다만, 우리의 동아시아론이 초특수주의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지, 때로 의심이 떠오를 때도 없지 않습니다. 의심이 아니라 물음으로 황홀히 숙성시킬 거점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이 서있는 자리, 즉 실존적 조건을 온몸으로 사유하는 최수운(崔水雲)의 의젓함이 눈에 띱니다. 하늘의 영(靈)이 강림했다는 소문에 그를 찾아온 사방현사(四方賢士)들과 문답하는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논학문(論學文)」은 『동경대전(東經大全)』의 눈입니다. 선비들은 수운이 받았다는 천도(天道)가 양도(洋道)․양학(洋學)․서학(西學)과 어떤 관계인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데, 이 문답에서 동학이 비로소 태어납니다.
묻기를 “도가 같다고 말하면 서학이라고 이름합니까.”
대답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 나 학인 즉 동학이라.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르겠는가.
공자는 노(魯)나라에 나시어 추(鄒)나라에 도를 폈기 때문에 추로의 풍화가 이 세상에 전 해 온 것이어늘 우리 도는 이 땅에서 받아 이 땅에서 폈으니 어찌 가히 서라고 이름하겠는 가.“ (『천도교경전』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2001 포덕 142년, 32면.)
이 대목은 동학의 발생학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유학(儒學)의 비판적 승계자 동학은 서학의 짝으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학은 유학이나 서학처럼 초특수주의가 아니라 천도라는 보편자의 지평을 엿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다른 이름을 들고 나왔는가? 수운은 자신이 몸받은 장소를 의식하는 실존의 감각에서 ‘동학’이 나타났다고 천명합니다. 그런데 ‘조선’이 아니고 ‘동’을 선택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동’은 항용 중국의 동쪽에 있는 조선을 가리키기 때문에 동학이 바로 조선학일 수도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또다른 층위가 엄연합니다. 서양의 ‘서’에 대한 동양의 ‘동’을 마주세우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동학의 동은 조선이요 동양입니다. 그럼 조선이 동을 대표한다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조선에는 과대망상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으니까요. 아마도 조선이 조선을 동의 일원으로서 여긴다는 뜻일 겝니다. 그러니 동학은 초특수주의도 아니요 동아시아적 보편주의도 아니요 보편적 보편주의도 아닌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회통으로서 출현한 것입니다. 과연 동학이 그 사명을 온전히 실현했는가? 얼핏 봐도 서학에 대한 공격이 성급니다. “서양 사람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순서가 없으며 도무지 한울님을 위하는 단서가 없고 다만 제 몸만을 위하여 빌 따름이라.”(「논학문」31면.) 또한 일본에 대한 비판도 그 절실성을 따르지 못합니다. 예컨대 “개 같은 왜적놈”이 「안심가」에는 두번 나옵니다.(『용담유사』 160면과 162면.) 이 외침에는 혹 조선선비들의 일본경멸이라는 유구한 전통이 어른거리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이 시대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유럽적 보편주의를 비판하되 동아시아적 보편주의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회통을 동학의 이름으로 내세운 수운의 길은 지금 우리에게 생생하고도 풍부한 암시입니다.
미국발 금융공황 속에서 세상이 또한번 변곡점을 감아돌고 있습니다. 보편제국 미국이 마침내 황혼을 맞이하고 오래된 제국 중국은 시절의 빠름에 내심 당혹합니다. 아직은 어렴풋하지만 중국의 변화를 결정하는 핵은 아마도 민주주의일 것입니다. 중국이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한 실험에 신중하게 착수할 것이란 예측이 움직이는 이 시절, 두 제국 사이에 낀 한국의 위상과 역할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와 중국으로 대변되는 동 사이에서 상호진화의 징표로서 새 동학의 길을 함께 개척할 서남학맥의 두터운 협동을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최원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
(서남통신. 2009. 1. 2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