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식] “한국, 동아시아 평화체제속 중형국가로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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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3-05 07:33 조회20,6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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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태생적으로 대국(大國)이 되기 어렵습니다. 영토적 제약도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을 주변국들이 두고 보질 않아요. 참여정부의 동북아균형자론이 좌초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닙니다. 한국이 지역의 중심이 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주변국들로부터 강력한 견제가 들어왔던 겁니다.”
‘창비판 동아시아론’의 지적재산권자 가운데 한 사람인 최원식(60·사진) 인하대 교수(국문학)가 15년에 걸친 지적 여정을 매듭지었다. 1993년 이후 써 온 ‘동아시아론들’ 가운데 “그래도 좀 나은” 14편을 거두어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창비 펴냄)란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그가 서문에 옮겨놓은 심경은 이렇다. “겨우 이 정도인가 아쉬움도 작지 않지만 한편 이만하면 됐다는 단(斷)의 마음이 홀가분하다.”
지난 3일 서울 서교동의 세교연구소에서 만난 최 교수는 최근의 동아시아 형세를 ‘비등하는 대국주의’로 요약했다.
“중국은 잃어버린 자존을 회복하기 위해 대국굴기(큰 나라가 솟구쳐 일어섬)를 꿈꾸고, 일본은 막강한 경제력에 군사력까지 갖춘 보통국가 전환을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이명박 정부가 내세웠던 ‘747’이야말로 전형적인 대국지향의 부국강병론입니다. 모두가 대국을 향해 치닫는 곳에 어떻게 평화와 공영이 깃들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겸양과 절제다. 대국을 향한 욕망의 무한연쇄를 적절히 제어하는 것만이 파국과 공멸을 막는 길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대국주의의 유혹은 간단치 않다. 사대와 내침의 슬픈 기억만 간직해 온 한국인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저 역시 대국주의자의 기질이 농후한 사람입니다. ‘강도 일본이…’로 시작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을 읽고 한동안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했어요. 처음 ‘소국주의’를 얘기한 게 98년 <창작과 비평> 창간 30주년 때인데, 여기엔 소국주의를 밖으로 선언함으로써 ‘내 안의 대국주의’를 억제하려는 의지 또한 담겨 있었습니다.”
최근 최 교수는 한국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국가 형태로 ‘중형국가’를 제안하고 있다. 생태계 부담을 줄이고 복지와 분배를 악화시키지 않으며, 이웃나라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대국도 소국도 아닌 중간 수준의 국력이면 적당하다는 얘기다. 문제는 모두가 대국을 향해 내달리는 상황에서 홀로 다른 길을 걷다가는 생존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라는 문제 설정이 긴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 교수는 동아시아론의 문제의식을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국의 울타리를 넘어 한반도와 중국·일본, 나아가 미국·러시아까지 아우르는 한층 넓은 단위의 사유와 실천이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정의한다. 이런 인식이 처음 싹튼 것은 80년대 초반이다.
“1982년 백낙청 선생이 편집한 <한국민족주의론>이란 책에 ‘민족문학론의 반성과 전망’을 쓰면서 ‘제3세계론의 동아시아적 양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제3세계 문학을 대표하던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 막 출옥한 김지하 시인으로부터 교황청이 동아시아의 전통적 지혜로부터 가톨릭 갱신의 방향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도 자신감을 갖게 했지요.”
당시의 인식은 소박했다. 한국 문학을 제대로 보려면 한반도가 자리잡은 지역을 숙고하는 것이 필수적이란 생각이었다. 여기에 서구 자본주의도 동구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대안을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에서 찾아보자는 문명론적 관심이 더해졌다. 하지만 때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이론과 변혁론이 승하던 80년대였다. 최 교수의 동아시아론은 ‘물정 모르는 문학도의 한가로운 공상’쯤으로 치부됐다.
그러던 차에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91년 소련이 붕괴했다. 최 교수는 93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탈냉전시대와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이란 글을 발표했다. 냉전의 정신유산에 긴박돼 있던 진보 지식인 진영을 향해 지적 쇄신을 촉구하는 격문이자, ‘창비판 동아시아론’의 발진을 알리는 선언문이었다.
“글의 초점은 동아시아의 화약고인 한반도의 분단을 어떻게 평화적으로 극복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한반도를 동아시아 지역모순의 결절점으로 보고, 분단의 해소책을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거시적 구도 안에서 찾아보자는 것이었죠. 여기에 더해 동아시아가 공유하는 역사적 경험이나 문명적 자산이 동아시아 평화의 중요한 접합제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기대도 있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이후 동아시아론은 몇 차례 보완을 거듭했다. 이른바 ‘아시아주의’에 복병한 국가주의·패권주의에 포획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한·중·일 3국이 아닌 북한·대만·오키나와·홍콩 등 ‘주변의 시각’이 도입되고, 패도(覇道)의 대국주의와 길항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이 논구됐다. 이 과정에서 최 교수의 관심은 “꿈길에 유폐된 소국주의를 어떻게 현실로 불러올 것인가”로 모아졌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지혜는 뜻밖에도 백범 김구의 건국강령이다. 최 교수가 소개한 백범의 말은 이렇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나의 소원’)
글 이세영 기자
(한겨레. 2009.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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