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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광장은 여성에게 맡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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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6-24 09:17 조회21,5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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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소녀, 하이힐 20대, 유모차 부대. 한 달 이상 지속되는 촛불집회에 여성들이 대규모로 출몰했다. 축구를 남성성의 상징으로만 여겼던 한국 남성들은 2002년 월드컵 때 여성들의 거리 점령에 놀라워했다. 그래, 그들은 다국적 축구선수들의 성적 매력에 환호하는 ‘맹랑’하고 명랑한 20대였지만, 최소한 한국팀을 맹목적으로 응원하는 다 같은 ‘국민’ 아닌가. 그러나 이번 촛불집회의 ‘여성화’는 어떻게 다른가?

 

촛불집회가 지속되는 동안 특히 눈에 띈 것은 이른바 ‘촛불소녀’들이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텔레비전과 노래방을 점령한 한국 사회에서 광장으로 나온 10대 소녀들에 대한 호기심과 찬사는 이미 준비된 정서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귀여운 아이콘과 명료한 메시지로 촛불집회가 시작되던 초반부터 관심을 끌더니, 자유발언대에서 급진적인 반정부 발언으로 광장인들을 놀라게 했다. 10대 여성들의 발언은 경험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들은 광우병과 교육 민영화를 신자유주의의 음모로 정확히 읽어냈다. 학교 ‘0교시’ 도입, 학원시간 연장, 그 뒤를 잇는 검증되지 않은 미국산 수입소의 급식 배식은 학교를 ‘죽음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이미 학교성적에선 소년들을 여유롭게 따라잡은 똑똑한 소녀들은 나름대로 성평등 의식을 가지려고 애쓰는 386세대 부모의 수혜자다. 딸, 아들 ‘차별’ 없이 능력 있는 아이에게 ‘올인’하는 것을 가족 경영의 목표로 삼고 있는 중산층의 공부 잘하는 딸들은 ‘여성성’의 전통적 보호막 없이 냉혹한 경쟁에 내몰린 지 오래다. 이들은 공·사교육으로 포화가 된 자신의 삶을 더욱 척박하게 만드는 이명박 정부의 불순함을 가장 빠르게 감지했다. 소녀들은 부모들의 ‘우리 아이 최고 만들기 매뉴얼’을 자기 계발의 지름길로 이해하고 충실히 수행해 왔으며, 소년들처럼 온라인 게임에 눈도 돌리지 않았다. 소녀들의 성실함은 미래의 성공을 위해 부모와 사회와 한 일종의 타협이었다. 이런 그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인터넷, 메신저, 핸드폰을 통해 서로에게 정서적 지지를 보냈고, 학교와 학원, 집이라는 출구 없는 회로망에서 ‘탈주’하여 광장으로 나왔다. 교육 민영화라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항하는 학생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다.

 

내 아이에게 아픈 소를 먹일 수 없다며 유모차를 이끌고 시위에 참여한 여성 또한 새로운 정치 주체다. 이들은 자신의 삶의 딜레마를 거리에서 표현했다. 집회에 참석하고 싶지만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는 엄마로서 이들은 과감히 유모차를 끌고 와, 공공보육의 필요성에 대한 집회를 벌였다. 보호하겠다는 예비군들에게 ‘우리를 왜 보호하려 하느냐’고 반문하는 20대 하이힐 여성들도 새롭게 태동한 정치 주체다. 이 여성들이 만들어낸 촛불집회는 개방성, 유머, 창의성, 비판 의식이 결합된 문화장이었다. 여성들의 참여 덕분으로 정치가 기쁨과 열정을 주고받는 만남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광장의 ‘여성화’는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삶의 정치 표현장이었다.

 

개별화된 주체들이 태동하는 후기 근대 정치에서 ‘적’은 하나로 귀결될 수 없고, 전투적인 선언들은 다양한 논제(어젠다)들을 담아낼 수 없다. 향후 촛불집회가 남성 선동가 중심의 선언적 운동으로 회귀한다면 여성들은 광장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개혁이 무모하게 집행된다면 여성들은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나 집단적으로 출몰할 것이다. 기쁨의 정치학을 수행하는 소통의 공간인 광장은 이제 여성에게 맡겨라.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한겨레. 2008.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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