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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인간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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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3-19 07:58 조회29,6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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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한 달 만에 한 줌의 재로 변해 홀어머니에게 돌아간 베트남 결혼이민 여성 쩐타인란. 딸의 자살을 믿을 수 없었던 그의 어머니는 사인이라도 확인하려고 어렵사리 한국을 방문했지만, 아직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한 채 안타까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을 그의 마음을 감히 짐작인들 할 수 있을까?

 

란의 사인이 정확히 무엇이든, 그의 죽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책임을 면할 순 없다. “우리는 누구나 똑같은 인간이다. 단지 나라만 다를 뿐이다”라는 란의 절규에 우리 누구도 귀기울이지 못했다. 란뿐만이 아니다. 지난해에는 후안마이 등 남편의 폭력 등으로 숨진 베트남 여성들의 소식이 연이어 전해졌고, 마침내 베트남 정부가 우리 정부에 자국 출신 여성들을 잘 돌봐달라고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란과 같은 국제결혼 여성들의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지난해 베트남에서 만났던 여성들의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뒤 호찌민 여성연맹에서 운영하는 교육센터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공부하고 있던 스무 살 안팎의 어린 여성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부푼 희망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이민자 문제를 취재하며 그들을 맞이할 한국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선, 가난하지만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그들의 희망이 오히려 두려웠다. 우리는 그들의 소박한 희망을 온전히 지켜줄 정도의 문화적 토양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문화 사회 담론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그들을 돕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정부에서도 여성부의 전신인 여성가족부가 중심이 돼 결혼 이민자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모색했고, 인신매매적 국제결혼의 원인으로 지목돼 온 결혼중개 업체를 규율하는 결혼중개업법이 지난해 말 통과됐다. 또 <에스비에스>의 ‘사돈,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프로그램처럼 이주여성과 한국인 사이에 가로놓인 문화적 차이를 줄이려는 방송 등 매체들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인종과 민족을 넘어서는 세계화가 기층에서부터 이뤄지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주 여성들이 처한 현실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결혼중개업법은 인신매매적 결혼을 막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다. 정부조직법의 개정으로 결혼 이민자의 담당부서가 여성부에서 보건복지가족부로 이관됨에 따라, 이주 여성들을 성인지적 관점에서 건전한 시민으로 대우하기보다는 복지나 시혜의 대상으로 치부할 가능성도 많아졌다. 이주 여성들의 가정내 상황 역시 여전하다. 2007년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 결혼이주 여성의 12.3%가 가정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물리적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격적 모독이다. 결혼 비용을 온통 다 부담한 남성들은 여성들을 대등한 배우자로 보는 대신 돈 주고 산 소유물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옥천에 살고 있는 한 베트남 여성은 남편이 걸핏하면 “네게 든 돈이 얼만데!”라고 말한다며 “그럴 때 남편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한다.

 

그렇다고 외국인 아내를 학대하는 한국 남성들의 문제를 그들만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다. 많은 경우, 그들 역시 우리 사회에서 비인간적 처우를 견뎌내 온 약자들이다. 그들의 행위는 지난해 6월 술에 취해 결혼 한 달 된 아내 후안마이를 구타해 숨지게 한 남편에 대한 판결에서 김상준 판사가 지적했듯이 우리 자신의 야만성, 우리 사회의 야만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와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노력하는 대신 쉽사리 적으로 돌리거나 짓밟는 비인간적 사회, 그 속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가 길을 잃고 있다.

 

권태선 논설위원

(한겨레 2008.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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