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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영어는 만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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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1-30 16:19 조회30,1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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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지상주의로 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지난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내놓은 영어 공교육 강화정책을 들은 한 대학 영어교육과 교수의 개탄이다. 사교육비의 절반이 들어가는 영어과외 문제를 해결하고 영어 말하기·쓰기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인수위의 목표는 나름 타당하다. 농촌 등 낙후지역의 영어 격차를 줄이고 기러기 아빠, 펭귄 아빠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인도적 이유까지 들었으니 그 뜻 역시 가상하다.

 

그럼에도 인수위안이 여론의 반대에 직면에 일주일 만에 영어 몰입교육 등 주요 정책안을 되물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말꼬리 잡을 뜻은 없지만, “아무리 좋은 정책, 좋은 아이디어로 준비해도 국민의 공감을 얻고 소통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는 생각”이라고 한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어제 발언 속에 그 답이 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인수위가 내놨던 정책은 좋은 정책의 요건을 갖춘 것이었다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크게 지적할 점은 현실인식 부족이다. 2010년부터 고교에서 영어로 수업하겠다는 안만 해도 그렇다. 지난해 서울시 고교영어수업지원단에서 경력 5년차 이상 교사 가운데 실력 있다고 평가받는 80여명에게 일년에 두 번 이상 영어로 수업할 수 있는지 조사해 봤더니 10명만 가능하다고 답했다 한다. 교육부 조사에선 초·중·고 영어교사의 30~50%가 영어로 수업이 가능하다고 나오지만, 부풀려진 통계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2차에 말하기 시험이 있는 최근 임용고시를 통과한 교사들은 낫지만, 이들도 고등학교 수업을 무리없이 끌어갈 수준으로 보긴 어렵다고 한다. 학생들 역시 영어 격차가 심각한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2년 뒤부터 고등학교에서 영어로 수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현실인식의 부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또하나의 사례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병역특례를 준다는 발상이다. 그러지 않아도 기회만 되면 병역을 피해 보려는, 일부 부유층의 특례를 위한 외국유학을 부추기고, 이것이 사회적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들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영어 격차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토록 사회적 격차에는 둔감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또 교육의 한 주체가 돼야 할 교사들에 대한 배려의 부족 역시 심각하다. 영어 공교육강화 태스크포스팀을 맡게 된 이주호 인수위 사회교육문화분과팀장은 여러 차례 평가에서 일정 수준에 미달하면 영어 수업을 맡지 못하게 하는 ‘삼진 아웃제’ 법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인수위 차원에서는 검토한 바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그의 생각임은 분명하다. 어떤 개혁도 현장에서 이끌어갈 주체를 적으로 돌리거나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아마추어리즘이다. 영어 몰입교육이 대표적이다. 인수위는 이를 국가단위에서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서울시교육청 등 일부 시도에서는 시범학교 수를 늘리는 등 확대할 조짐이다. 그러나 일부 교육학자들은 인지학문적 언어능력과 기초 상호적 의사소통 능력을 혼동하는 영어 몰입교육은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남대 이영식 교수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손성옥 교수가 2001년 이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 몰입식 교육이 수학·과학 성적을 떨어뜨렸음을 확인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고 전한다.

 

언어학자들은 대체로 의사소통 능력이란 단순한 언어능력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지식과 배경지식을 포함하는 능력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영어가 만병통치약인 양 떠들 게 아니라 전반적인 소통능력을 높일 수 있도록 우리말 능력을 포함해 전반적인 교육의 질 높이기를 고민하는 게 순서다.

 

권태선 편집인

(한겨레. 200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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