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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비례대표제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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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3-12 13:47 조회24,5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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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게임이든 그 결과는 크게 두 가지 변수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는 선수이고 다른 하나는 규칙이다. 그런데 선수 변수와는 달리 규칙, 혹은 제도 변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동일한 규칙 아래서는 선수의 뛰어남만이 게임 결과를 결정한다. 그러나 규칙이 바뀔 경우 그 선수 변수에 변화가 오며 상황은 달라진다. 예컨대, 농구대 높이가 현행보다 30㎝만 낮춰지면 키 작은 선수들도 얼마든지 ‘뛰어난’ 선수가 될 수 있고, 경기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 축구 경기를 선수 교체나 전·후반전 구분 없이 90분 연속 치르는 것으로 그 규칙을 바꾸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승리는 대부분 개인기나 민첩함보다는 지구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많은 팀에게 돌아갈 것이다. 요컨대, 규칙이나 제도가 선수의 우수성을 규정하고, 그것이 게임의 결과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선거정치라는 게임도 마찬가지다. 전국을 수많은 소지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구에서 오직 한 사람만을 국회로 보내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에서는 무엇보다 지역구민에게 ‘인기 있는’ 정치인이 뛰어난 선수로 평가된다. 정치인의 우수성이 협애한 지역 이익과의 친화성 정도로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설령 어느 정치인이 보편적으로 훌륭한 이념이나 정책 지향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역 인기로 연결되지 않는 한 그는 결코 유력 주자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지역주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한국적 정치 상황에서 지역 선호를 고려하지 않고 이념이나 정책으로만 승부를 보려 한다면 그의 승리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 이렇게 ‘열등한’ 정치인들이 모여 이념이나 정책 정당을 만들 경우 그 당이 선거정치에서 고전할 것은 뻔한 일이다. 오직 특정 지역과 인물에 기반을 둔 정당만이 살아남거나 번창할 수 있는 게임 구도인 것이다.

 

그러나 선거정치의 규칙을 바꾸면 게임 양상은 변한다. 전국을 한 선거구로 하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전면 도입하는 경우를 보자. 이제 시민들은 지역구의 개별 후보가 아닌 전국 정당에 대하여 투표한다. 선거의 성격이 개인전에서 정당간 대결로 크게 바뀌면서 각 정당의 이념이나 정책 노선의 중요성이 급상승한다. 여기서 뛰어난 선수는 지역 인기가 높은 명망가가 아니라 이념과 정책 지향이 분명하여 전국적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정치가다. 이러한 선수들을 많이 확보한 정당일수록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 방향으로 선거정치 변화는 가치와 이념 그리고 정책 대결이 벌어지는 정당정치의 ‘선진화’로 이어진다.

 

비례대표제가 처음 한국 선거정치에 도입된 것은 2004년 총선에서였다. 그 덕분에 이념정당인 민주노동당이 무려(?) 10석을 얻었다. 계속 ‘열등했던’ 선수들이 제도 변화로 인해 자신들의 뛰어남을 증명할 수 있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쉬움은 여전히 남았다. 총 299석 중 겨우 56석만을 비례대표 의석으로 돌리는 현실에서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기대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그저 향후 우리 정치권이 비례대표를 확대해나가 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지난 2월 말 비보가 들려왔다. 주요 정당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비례대표가 54석으로 오히려 줄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명확히 개악에 해당하는 조치다. 선진화를 유난히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의 5년 기간 내내 가슴에 품어야 할 또 하나의 바람이 생겼다. 정당정치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이제 시민사회가 나서 선거제도 개혁을 촉구하고 주도해가야 할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최태욱/한림국제대학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한겨레. 2008.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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