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대운하를 파자는 ‘목동’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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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4-04 08:29 조회26,43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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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광 좋고 향초 우거진 푸른 초원이 있다고 치자. 이곳엔 누구나 자기 가축을 끌고 와 풀을 먹일 수 있다. 처음에는 가축이 풀을 아무리 뜯어먹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땅은 넓고 동물 수는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동들이 점점 더 많은 가축 떼를 풀어놓는다고 치자. 좋은 풀은 줄고 대지는 오물로 범벅이 되고 토양은 침식된다. 초원은 이제 잡초밭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목동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진해서 가축 수를 줄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태는 계속 악화된다. 이것을 19세기 초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포스터 로이드는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했다. 주인 없는 땅이라고 모두가 무책임하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목동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할까?
꼭 40년 전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대의 개릿 하딘이라는 생물학자가 <사이언스>(162권 3859호)에서 ‘공유지의 비극’ 문제를 다시 다루었다. 이 글은 <사이언스> 역사상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읽힌 논문이 되었다. 하딘은 공유지의 목동들이 나름대로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목동의 처지에서는 가축 한 마리를 더 풀어놓을 때마다 ‘플러스 1’만큼의 혜택이 생기지만, 그 가축 때문에 초원이 훼손되는 ‘마이너스 1’만큼의 피해는 모든 목동들에게 골고루 분산되기 때문이다. 이익은 크고 구체적이지만, 피해는 미미하고 간접적인 것처럼 보인다. 목동들의 행동은 개인 차원에서는 ‘합리적’인 것 같아도 전체로 보면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근시안적인 합리성이고, 제 무덤을 파는 합리성이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하딘은 인간이 진화과정 속에서 독특한 심리적 부인기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전체 공동체가 망해도 자기만큼은 살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기 쉽다고 지적한다.
그 후 ‘공유지’는 넓은 의미의 ‘공유재’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오늘날에는 산천, 해양, 대기, 삼림, 어획고, 국립공원, 심지어 라디오 주파수까지도 공유재로 간주하는 게 세계적인 추세다. 공유재 개념은 현대 환경권 사상의 핵심이 되어 현재의 모든 인류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도 포함하는 개념이 되었다. 독자들은 이미 필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이 땅의 가장 소중한 공유재인 금수강산이 살해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한반도 대운하를 파자고 나선 목동들 때문이다. 이들이 자기들의 이익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한다고는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다. 대운하를 파야만 대한민국의 ‘국운’이 융성해지고 모두가 잘살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런 황당한 발상을 진심으로 믿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학자와 전문가와 정치인의 탈을 쓴 ‘정신 나간’ 목동에 불과하다. 경제니 물류니 관광이니 하면서 혹세무민하는 미치광이 목동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자손만대가 영원히 살아가야 할 이 땅의 공유재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 만에 하나 우리 세대가 일시적으로 득을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럴 권리는 없다. 환경 홀로코스트를 저지르고 이 땅의 공유재를 파괴한 천인공노할 범죄집단 조상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가? 지금은 꼬리를 내리고 있지만 이들은 총선에서 이길 경우 대운하를 기어코 강행할 게 뻔하다. 국민여론에 따르겠다고? 소가 웃을 노릇이다. 도면상에서 이미 삽질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하딘은 공유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합의에 의한 강제조처가 필요하다고 했다. 선거는 그런 조처의 첫걸음이다. 대다수 양식 있는 목동들이 미치광이 목동들의 개발 광란을 저지하는 것, 그것이 이번 총선의 핵심 이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조효제/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08.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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