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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상자 속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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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3-17 09:14 조회31,3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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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시간강사였던 그는 자신을 ‘상자 속의 사나이’라고 불렀다. 상자 밖으로 나오는 방법은 세 가지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교수가 되는 것과, 학자의 삶을 포기하고 뒤늦게라도 다른 생업을 찾는 것, 아니면 사회 부적응자가 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악조건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그가 결국 선택한 것은 죽음이었다. 2003년 그의 죽음 이후 최근까지 시간강사들의 죽음이 잇따르고 있다.

 

나에게도 그 상자 속에 갇혀 있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당 2만5천원짜리 강의를 하기 위해 새벽에 나와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씩 갈아타고 여러 학교를 전전하던 시절. 주당 24시간을 채우기 위해 하루에 6시간씩 강의를 하고 돌아오는 길, 입에서 쓴내가 나면서도 ‘강사 재벌’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하던 시절. 그러나 상자 밖으로 나온 교수들이 곧 상자 속의 어둠을 잊어버리듯, 어느새 ‘나’의 고통은 ‘그들’의 고통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대학 내부를 들여다보면, 교수들은 강사들의 고통에 대한 방관자를 넘어 가해자에 가까운 경우가 적지 않다. 강사들의 처우와 강의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마음대로 부리려고만 든다. 강사들을 괴롭히는 건 단순한 생활고가 아니다. 신분적 약자로서 교수들의 요구와 처분에 따라야 한다는 것과 임용의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지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절망감을 느끼는 이유다.

 

대학은 무엇을 했나. 전체 강의의 40% 이상을 시간강사에게 맡기면서도 그들을 교원으로 인정하고 강의료를 현실화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어떤 정책을 시행할 때 그 실험대가 되거나 과중한 업무를 떠맡는 것은 시간강사들이다. 어떤 대학에서는 강의 녹화와 분석을 의무화하거나 강의 평가를 공개하는 것도 교수들의 반대로 시간강사들에게만 적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해가 갈수록 신입생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공채를 무한정 늘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교수 봉급이나 등록금 인상률에 비추어 비슷한 수준이라도 강사비를 인상하고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편 정치인들은 무엇을 했나. 자신이 공천에서 떨어지는 것을 ‘피의 목요일’ ‘살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쓰면서도 실제로 ‘사회적 살해’를 당하는 시간강사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작년 5월에 발의된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1년 가까이 표류 중이다. 2003년 시간강사가 자살한 직후에도 국회의원들은 시간강사 관련 예산 400여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보호법에서도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경우는 법 적용에서 제외하도록 만들었다. 현실은 일용직보다 못한데도 고학력이라는 이유만으로 최소한의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게 시간강사들의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교육부는 무엇을 했나. 국공립대 강사료를 약간 올린 것 말고는 시간강사에 대한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는 예산 부족만을 내세워 손놓고 있을 게 아니라, 열악한 처우가 대학교육의 질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요인임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종합적인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강사들에게 고등교육법상 교원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

 

서울대 인문대 강사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70%가 교수될 희망이 없다고 대답했다. 지금도 5만 명이 넘는 시간강사들이 생활고와 인격적 침해,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 등을 감내하며 어두운 상자 속에 있다. 새 학기를 맞아 교정에는 꽃들이 피어나고 활기가 감돌기 시작하지만, 그 상자 속은 여전히 겨울이다.

 

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한겨레. 2008.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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